brunch

매거진 책과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기 Apr 25. 2021

친애하고 친애하는

올해 초 서점에서 덥썩 사버렸던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를 읽고, 그 뒤에 그 작가의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를 또 사서 읽고, 그리고 최근에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또 사서 읽었다.

작가의 문장들이, 표현 방식들이, 주제들이 나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한 시간이 넘게 읽게 되니 말이다. 어떤 주제의 책인지도 모르고 사버린 책들인데 모두 멋진 소설들이었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어머니, 할머니. 혹은 어머니. 할머니이지만 어머니에 가까웠던 할머니, 어머니이지만 너무 먼 느낌의 어머니. 그 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그 두 어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 자신도 어머니가 되어가는 이야기.


나에게는 너무 먼 주제이고, 남자라서 닿을 수도 없는 부분이 있는 주제이지만,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들이, 언제나 생각처럼 평범하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자식과 부모 사이에는 맞닿을 수 없는 기대와 삶이, 상대방과 엇갈리게 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건 친구들 사이에서도, 혹은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막연함, 그리고 그 길을 가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서로의 생각.


다른 것보다 제일 마음에 닿았던 내용은 아래의 두 부분이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 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였는지도 모르겠다.
p.91

식구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이런 것을 보면 가족과 식구와 친구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생각보다 중요하게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엄마가 제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장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 그러니까, 아기를 낳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리 없으며, 나는 젊으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말해주기를. ...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엄마는 벌을 받는 사람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무리해 그럴 거 없어. 결혼해 아이만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지."
p.110-111

이 부분은, 딸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 친하지 않은 엄마에게 위로 한마디를 바라지만 엄마는 결국 항상 그렇듯 그 기대를 져버리고 딸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말을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의 측면으로만 생각하기 힘든 것은, 저 말에는 엄마가 자신이 택한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후회나 딸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이지만 방향을 조금 비껴간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결국에는 언제나 그렇듯 딸에게는 상처가 되는, 그런 말과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일 수 있겠다.



그리고 아래는, 마음에 들었던 다른 부분들이다.


스물두 살이 되었던 그해 봄, 내가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것은 미뤄두었던 설거지를 막 마치고 창밖을 잠시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창밖 커다란 나무의 우듬지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일제히 꽃송이처럼 떨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약하자면, 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할머니네 집에 가서 혼자 지내는 할머니를 몇 달간 '돌봐드리라'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넌 할 일도 없잖아."

엄마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내뱉었다.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데도, 딱지가 앉지 않은 상처를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욱신댔다. 심각한 워커홀릭인 엄마의 눈에는 전공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사경고를 받다가 진로를 바꿔야 할 것 같다며 돌연 휴학해버린 나는 게으른 사람에 불과했다. 엄마에게 게으름은 곧 무능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p.10-11


서울에 있을 때는 외출하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변화가 좋았다. 가끔 집 밖을 나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교생활을 하느라 바쁜 친구들을 매번 불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 되뇌긴 했지만 그 무렵 나는 내 자신이 실패자이자, 낯선 곳을 표류하는 낙오자가 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해진 일상이 있는 사람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을 반복해 만날 때마다 누구나 속해 있는 현재라는 국가의 불법체류자가 된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다.

p.23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생각나는 밤이면 나는 이제,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어쩌다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계단을 바삐 올라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보거나 8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어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걸까?

p.25-26


나와 할머니가 아가다 할머니나 글로리아 할머니를 좋아했던 것은 두 할머니 모두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할머니를 "언니, 언니"하며 따랐던 글로리아 할머니나, 우리 할머니가 "언니, 언니"하며 따랐던 아가다 할머니 둘 다 우리 할머니와는 성격이나 외모 모두 조금도 닮은 점이 없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타지 출신이라는 점일 텐데, 아가다 할머니는 화교였고, 글로리아 할머니는 마산에서 올라와 정착한 사람이었다. 친정 식구들을 다 두고 피란 온 우리 할머니에게는 그들이 자매들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할머니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있었던 엄마보다 더 빨리 우리 할머니에게 달려온 사람은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였다.

p.29-30


이따금씩, 폭우가 쏟아지는 어떤 날들에는 마루에 앉아 할머니와 완두콩 콩깍지를 벗기거나 콩나물을 다듬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화를 할 때마다 할머니는 나와 엄마를 자주 패키지로 묶어서 말했다. 너와 엄마는 낯가림이 심했지, 라거나 너와 엄마는 글자를 빨리 깨쳤지, 같은 식으로. 엄마와 나에게 공통분모가 있었나? 엄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에게 할머니의 그런 화법은 정말이지 낯설어서, 할머니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것이 엄마와 나라는 개별적 존재들을 묶을 만큼 특수한 공통점들인가, 웬만한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쯤은 다 공유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공통점들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p.39


할아버지와 그 여선생이 단둘이 있는 모습을 할머니가 직접 목격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일하던 초등학교 교실에서였고, 강화에서 태어난 엄마가 세 살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할머니는 엄마가 갑작스레 열이 나서 할아버지를 찾으러 학교에 갔다. 교무실에 할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빈 교실들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를 찾았다. 그곳, 3학년들이 수업을 받는 어느 빈 교실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그 여교사가 단둘이 있는 장면을 보았다. 둘이 손을 잡고 있거나 망측스럽게도 입을 맞추고 있었더라면 할머니는 뛰어 들어가 여선생의 머리를 휘어잡았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텅 빈 교실에서 그들은 그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여교사는 풍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고 할아버지는 그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풍금 말이다, 풍금." 여교사와 할머니는 동갑이었다. 사범학교를 나온 여선생. 고데기로 머리끝을 꽃봉오리처럼 말고 화장을 곱게 한 여선생. 일본제가 틀림없을 다후다 스커트를 입은 채 풍금을 치며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하던 가곡을 부르던 여선생. 할아버지를 차마 부르지 못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언가 서러운 사람처럼 할머니의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할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눈물이 난 것은 아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게 다 풍금 때문이었어."

p.59-60


브리즈번에 있을 때, 나에게 보리차를 소포로 보내주었던 사람은 할머니였다. 영어를 하나도 모르던 할머니는 빈 봉투를 크기별로 준비한 후에 할아버지에게 주소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원하는 시기에 봉투마다 보내고 싶은 내용물을 담아서 내게 보냈다. 봉투를 열어보면 그 속에는 보리차라든지, 고추장 같은 게 있을 때도 있었지만 털양말이나 내복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할머니는 호주와 한국의 계절이 반대라는 것을 몰랐다. 소포 안에는 할머니의 철자가 다 틀린 편지가 언제나 들어 있었다.

p.67


그다음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었다. 젊은 여자와 남자는 서둘러 결혼했고, 학업을 지속해야 했던 남자는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다. 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며 출국 준비를 하던 중 여자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출국을 늦춰 딸을 낳은 이후 남자를 따라 미국에 갔다.

"그래서 미국은 엄마가 상상했던 그대로였어요?"

아니다. 내가 그때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라 갓 낳은 아이를 두고 갈 만큼 미국이 좋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웠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자유로웠지."

...

나는 엄마가 미국 생활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기분이 상했는데, 그것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엄마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엄마가 그곳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들었다든지, 외로웠다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나 역시 할머니네 집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니까 역시, 엄마 인생에는 엄마의 공부가 가장 중요했던 거네요."

평범을 가장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내 귀에도 비꼬는 것같이 들렸다.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엄마는 입을 다물고 누구와 갈들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엄마의 그런 옆모습을 볼 때면 항상 상처를 받곤 했지만, 적어도 그날엔 그런 말을 내뱉은 나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더 컸다.

p.77-79


전화를 받은 할머니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ㅎ동 집으로 왔다. 유리그릇에 파김치와 열무김치를 덜어 담고, 삼계탕은 사기그릇에 담아 할머니들 앞에 하나씩 놓고는 나도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들이 어쩐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 닭의 살을 발라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들은 수십 년째 복날이면 같이 삼계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복날에는 삼계탕을 나눠 먹고,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고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함께 먹는 사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좋은 날 같이 보낼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할머니는 언젠가 내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할머니를 살게 했던 사람들은 나나 엄마가 아니라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였는지도 모르겠다.

p.91


할머니는 엄마처럼 입이 짧은 편이었지만 엄마와 달리 요리를 즐겼고 무엇보다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를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 나의 유년 시절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아주 자주 부엌을 서성였다. 대부분의 경우 할머니는 나와 할아버지를 위해서 고등어를 굽거나 칼국수를 만들고 꽃게를 사다가 커다른 들통에 쪘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집으로 찾아오는 할머니의 친구들이라거나 할아버지의 학교 선생님들, 피란 왔을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신세를 졌거나 혹은 신세를 베풀어 주었던 지인들을 위해서도 음식을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음식 욕심이 그다지 없는 할머니가 요리를 즐겼던 것은 할머니에게 주어진 일상의 일들 중 그것이 가장 창의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갓 만든 음식을 예쁜 식기에 담고 얇게 썬 붉은 고추나 잣으로 고명을 올리는 그런 디테일이 할머니에게는 중요했다.

p.97-98


도시 외곽에 위치한 요양병원. 뜰에는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산책로 옆으로 코스모스가 피던 요양병원에서 할머니는 여섯 달을 더 살았다. 그 여섯 달 동안 할머니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가 병원까지 들고 간 노트, 할머니의 일기장이자 가계부이고 전화번호부이기도 한 그 노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었다. 할머니의 연락을 받은 먼 친척들이나 이웃들, 살아오는 동안 할머니가 도움을 주었거나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차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의 머리맡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그중 할머니를 보러 병원에 가장 많이 온 사람은 물론 아가다 할머니와 글로리아 할머니였다.

p.101


용기를 짜내어 엄마를 불렀다. 엄마라는 말을, 마치 처음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

내가 두 번째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 엄마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엄마가 화를 삭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요."

내가 엄마의 옆에 가 앉으며 말했다. 엄마가 우는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엄마의 눈물을 보자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

"엄마, 엄마도요, 내가 생겼을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도 엄마는 학업 중이었고, 무엇보다 엄마는 아이를 낳고도 엄마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엄마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108-109


나는 엄마가 제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장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짜 자신의 자아실현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실수로 아기를 갖는 그런 멍청한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그러니까, 아기를 낳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리 없으며, 나는 젊으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말해주기를. 지금 당장은 이렇게 벌어진 일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당황스럽고 감당하기 벅차 우리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선택이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도 엄마도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나라면 예전처럼 도망만 가지 않고 무엇이 되었든 내 미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엄마는 그저 물병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엄마는 벌을 받는 사람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무리해 그럴 거 없어. 결혼해 아이만 키우는 것도 좋은 삶이지."

p.110-111


엄마가 그해 겨울 요양병원 5층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마에게 언젠가 그것에 대해 물어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런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타인이 하는 모든 말의 의도를 어떤 식으로든 알아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많은 경우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떤 말의-심지어 자신이 한 말조차도- 의도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다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엄마의 그 말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남편의 외도와 딸의 거듭되는 방황을 수차례 목격한 여성이 조금쯤의 자책과 회환을 담아 이제 막 엄마가 되려는 어린 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전한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데 이르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나에 대한 모든 기대를 잃었으며 낙담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엄마가 일생 동안 단 한번도 결혼 생활과 육아를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사회적 성공보다 우선시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p.117-1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