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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기 Jan 02. 2021

여름의 빌라

1월 1일 저녁의 교보문고. 한여름의 풍경이 담긴 옅은 색의 유채화 표지를 보고, 그 위에 눈에 잘 띄지 않게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적은 책을 보고, 단편 소설 모음집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충동적으로 사게 되었다.


기대를 했던 것은 소소한 배경 속에 담긴 일상적인 이야기였는데, 단편들의 초반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전개되었지만 중후반으로 갈 수록 생각할 꺼리가 많아지는, 조금은 강렬한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그렇다고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나 곳곳에 송곳들이 튀어나오는 정도의 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번 자리를 잡고 읽기 시작해서 2/3 정도를 쭉 읽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오늘 차분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잡아준 고마운 책이 되었다.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보고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잠깐 떠올렸는데, 그런 주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배낭여행의 기억과 그 때 만나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노부부, 그리고 결혼 후 힘들어하는 주인공과 남편, 그 모두와 노부부의 손자가 캄보디아에서 잠시 만나 여행하며 '여름의 빌라'에서 지내며 나누는 경험들과 생각들, 그리고 슬픔과 그 뒤의 감정들. 여러가지 상황과 감정과 대화와 생각을 옅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괜찮아, 주아. 우리는 생각을 교환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고."

나는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저 식탁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댈 뿐이었어요. 대화를 이어나간 것은 한스였습니다.

"그런데 지호, 자네는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그들의 얼굴을 보고도 그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내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어. 그들에게는 보트를 젓고 바나나를 파는 것이 다 노동인 거야. 일 달러 팁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고. 그들에게는 수상가옥과 그들의 삶이 돈벌이 수단이야. 관광객들이 원숭이를 보듯 바라본다고? 하지만 관광객들이 없으면 어찌되겠어? 그들은 지금처럼 먹고살 수조차 없어. 자네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돈 버는 일이나, 이곳 사람들이 바나나를 팔면서 돈 버는 일이 다른 행위라고 생각해? 나는 그런 생각이 오히려 그들의 노동을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비가 계속 내리고 바람이 불어 야자수가 휘청거리는 소리가 시시로 들려왔어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그렇지, 베레나?"

한스가 당신의 어깨를 감싸며 웃었습니다. 나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당신들을 따라 웃으려고 했어요.

"개소리"
지호가 낮게 말을 맽었습니다.

p.65

이 대화에서 한스는, 여행을 오기 1년 전, 2016 베를린 크리스마스마켓 테러로 딸을 잃었다. 그리고 지호는 세상의 부조리함, 경제적 어려움, 투쟁, 생존..등에 대한 생각이 많은 인물이다.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편지를 마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도착역을 알리는 방송이 곧 나오고 기차는 역사 안으로 들어설 테지요.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은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런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에게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p.71

한스의 아내인 베레나는, 캄보디아 여행 이후 몇 달이 지나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리고 주인공인 주아는, 이렇게 베레나에게 보내는 답장을 마친다.


그리고 단편집에 있는 소설 중 하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매캐한 냄새 사이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장미 향이 섞여들었다. 향기 속에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페 뮐러>가 등장하는 그 영화를 본 후 극장 근처의 사층짜리 카페에서 오렌지 아이스티를 마셨던 어떤 오후를. 반짝이던 유리컵, 향긋했던 오렌지 조각, 투명하게 찰랑거리던 각얼음. 깊고 말은 하늘이 펼쳐진 창가의 자리에서 한나는 영화 속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이 아니지, 그런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국수를 먹기 시작하고, 영원처럼 정지한 듯한 풍경 위로 헐벗은 그림자가 침묵 속에서 간혹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p.165

소설의 제목은, 피나 바우슈의 <왈츠>에 나오는 대사 "와인 조금만 더. 그리고 담배 한 개비만. 하지만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의 일부를 차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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