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읽어야지 하고서는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김초엽작가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다. 우리나라 SF소설은 한두권 정도밖에 읽지 않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과학 지식에 기반한 소설은 처음이었고 너무 좋아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나에게는 테드 창의 소설집보다 훨씬 잘 맞는 소설이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테드 창의 소설도 좋지만, 너무나도 과학적 기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따라가기 힘든 느낌이 들었는데, 김초엽의 소설은 과학적 기반을 사용하지만 사람에 대한 관계, 감정과 이야기들이 그 위에 펼쳐지기 때문에 나의 감정이나 생각들이 더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다른 소설들이 어떤 문제나 상황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이를 풀어가거나 이야기를 더 고조시킬 때 그 배경을 지극히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하거나 상상의 세계를 기반으로 했다면, 이 SF 소설집은 과학적 상상의 세계를 기반으로(과학적이라고 해야 할지, SF적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문제를 드러내거나 문제를 풀어가거나, 사람들간의 관계에서도 과학적인 상상의 요소들이 매개가 되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덤으로, 단편 대부분에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도 신선하며 좋았다. 그러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고 당연히 이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될만큼 말이다. 특히 관내분실에서는 말이다.
모든 단편이 다 좋았는데, 특별히 기억이 남는 것을 꼽아두자면,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서 주인공인 안나가 말로 들려준 슬픈 SF적인 현실이었다.
"슬렌포니아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한때 슬렌포니아는 우리에게 가까운 우주였는데, 웜홀 항법이 도입되면서 순식간에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네. 그곳에는 통로가 없었던 거지."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래는 소설들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전자책으로 읽어서 페이지를 매길 수가 없었다.
희진은 학자였다. 알아내고 분석하는 것이 본래의 업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도구도 없는 이곳에서 희진은 너무나 무력했다. 만약 일이 제대로 풀렸다면 희진은 탐사선의 수많은 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언어 분석 프로그램은 가청주파수를 넘어서는 음파들로부터 반복되는 패턴을 읽고 무리인들의 언어를 분석해줄 것이다. 무리인들이 오늘의 사냥과 열매들의 위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지, 그들의 거주지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생명체에 대해서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희진에게 있는 것은 희진의 신체와 감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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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인들이 지구인에 비해 무척 짧은 수명을 가졌다는 사실과, 아무리 길어야 3년에서 5년의 삶을 산다는 것을 할머니가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몇 번을 들어도 놀라웠던 것은 할머니가 묘사하는 무리인들의 가장 독특한 속성이었다. 무리인들은 죽음에 이른 다음에도 죽지 않는다고 스스로 믿는다. 무리인들의 믿음 안에서 자아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몸을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전달될 뿐이다. “그들은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진다고 믿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 번째 루이를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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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진은 묶여 있던 그림 뭉치를 집어 들었다. 희진은 그림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들. 잎종이를 가득 채우는 색과 비정형의 얼룩들. 그동안은 단지 그들의 미술이 독특하게 발달했다고만 생각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희진은 그림들에서 어떤 일정한 패턴을 발견했다. 어떤 귀퉁이에는 계속해서 같은 배색의 얼룩이 나타났고, 또 어떤 얼룩은 두 번에 한 번을 건너뛰어 나타났다. 그림들이 동굴 바닥으로 흩어졌다. 희진은 그림들을 나란히 바닥에 펼쳐놓았다. 도저히 겹칠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한 배색들 중에도 동일한 패턴이 계속 반복되곤 했다. 그동안 희진은 문자 언어의 형태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형태가 아니라 색의 차이, 색의 패턴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만약 이 그림들이 무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면. 그들이 형태가 아닌 색상의 차이를 의미 단위로 받아들인다면. 루이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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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느슨해졌다. 루이가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 지내던 바로 그 루이처럼 느껴졌다.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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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은 이전 개체가 남긴 기록을 읽고 습득하여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전의 루이들이 희진을 돌보고 아꼈기 때문에 새로운 루이도 희진을 돌보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는 어떤 대단한 결단의 과정이 없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루이’가 된다. 그들은 분절된 개체이다. 희진은 한 루이가 죽고 다른 루이가 다시 그 자리를 채울 때 연속적이지 않은 두 자아 사이의 어긋남을 목격했었다. 영혼은 이어질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다른 루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록된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루이로서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경험, 감정, 가치,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그렇다면 희진도 그들을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이상한 가정 하나를 해보자. 수만 년 전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어떤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다고 말이다. 미토콘드리아가 세포 내로 들어와 핵과 별도의 DNA를 가진 채로 수십억 년의 공생을 시작한 것처럼, 별개로 출발한 두 종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생하는 일은 흔하다. 인간은 수많은 체내 미생물들과도 공생한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유래한 그들을 이질적 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일부이다. 하지만 만약 공생의 대상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지구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것, 수만 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지구 밖의 어느 행성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뇌에 자리 잡았고,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했고,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가르쳐왔다면.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남자가 아는 바로도 이제 워프 항법을 이용해서 운항하는 우주선은 없었다. “문제는…… 웜홀을 이용하는 항법은, 이미 우주가 가지고 있던 통로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야.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 대개의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 웜홀을 안정화하는 방법이 알려진 이후로 수많은 통로가 발견되었으니까. 우주 여행의 역사가 다시 쓰였지. 슬렌포니아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한때 슬렌포니아는 우리에게 가까운 우주였는데, 웜홀 항법이 도입되면서 순식간에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네. 그곳에는 통로가 없었던 거지.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향하는 통로도, 심지어 그 근처로 가는 통로도. 항해 기간이 길어야 한 달로 압축되어버린 새로운 개척 시대에 이미 존재하는 통로만으로도 모두 가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별과 행성이 있는데, 이제 뭣하러 몇 년도 넘게 잠을 자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우주선을 보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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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생각해보게. 완벽해 보이는 딥프리징조차 실제로는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안나 씨.”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제 허공을 가득 채운 침묵이 느껴졌다. 보현을 무슨 말로 위로해야 했을까? 나는 순간 보현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가슴속에서 빠져나가버린 듯 싸늘했고, 나는 그게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감각임을 알았다. 그제야 어설프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었다.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 보편화된 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영혼이 데이터로 이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곧, 이식된 데이터는 고유의 자아와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는 반론이 쏟아져 나왔다. 자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실험이 마인드들을 대상으로 수없이 행해졌다. 오랜 논란 끝에 학계에서는 마인드들이 단지 생전의 망자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낼 뿐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과거의 기억에 근거하여, 죽은 사람의 반응을 가상하여 보여줄 뿐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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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마인드를 어떻게 정의하든, 마인드 도서관은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여전히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은 달라졌다.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 이를테면 ‘그 사람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말해주었을까?’ ‘살아 있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분명 기뻐해줄 텐데……’ 같은 질문의 답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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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이 이어지면서,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