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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황 Dec 14. 2021

의전이 되어버린 골프

시니컬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골프는 시작부터 끝까지 배려야. 넌 기본적인 배려가 없어."


얼마 전 수년간 몸 담았던 전 직장의 역대 부서장님들과 라운딩을 다녀왔습니다. 무지막지하게 감사한 일입니다. 대기업의 임원분들께서 쪼렙 직장노예와 긴긴 시간을 함께 해주시다니요.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고, 깨달음도 얻는 시간이었지요.




골프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쁘게 꾸며진 야외공간에서 작은 구멍에 더 작은 골프공을 넣기만 하면 되는 단순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시간을 좋아합니다.


주로 골프는 친한 친구들과 즐겨 왔습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과의 골프는 순수한 레저로서의 골프였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얼추 여행 가는 듯한 느낌으로, 가급적이면 한 차에 간식까지 들고 모여서, 라운딩 후에는 '스크린이나 한판 더 칠까', '이 동네의 유명한 음식은 뭐가 있나'를 고민하며, 집에 오면 햇볕에 탄 얼굴보다 수다에 지친 목이 더 아픈, 그저 그런 레저활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골프를 많이 좋아합니다.


남들은 내기를 한다는데, 서로의 주머니에서 현금이 오갈 바엔 차라리 죽빵을 나누는 것이 편할 수도 있는 오랜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내기도 없고, 의전도 없는, 단순한 레저활동으로만 여겨왔습니다.


얼마 전 다녀온 전 직장 임원분들과의 라운딩이 제 인생 최초의 '레저 + @(알파)'가 되는 라운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약-부킹-라운딩-식사'로 이루어지는 라운딩 일정 중, 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웃어른과 함께하는 골프 라운딩에서 막내(그것도 한참 막내)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꾸중을 들었습니다.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어 인지하지 못했지만, 당연히 누군가는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고, 보통은 막내의 역할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꾸중을 들어도 핑곗거리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형님, 누님(이직했으니 편히 적어봅니다)께서 다 해주시고, 전 몸만 가는 양상이 되어버렸거든요.


"넌 기본이 안되어 있어. 여기 오면서 너가 준비한 게 뭐가 있냐. 형님들이 다 준비하고, 넌 몸만 온다는 거야? 기본적인 배려의 문제야 너"


선천적으로 의전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또 관계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라운딩에서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던 어린 과장이 괘씸하기도 하고, 알려줘야 할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덕분에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불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를 표현 안 하고 꾹 참은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그 당시 최선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배려가 부족했던 레저로서의 골프는 다음번에 약간의 의전을 보태자는 마음가짐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고, 늘 제게 가르침을 주는 분들이고, 다음에 꼭 다시 모시고 싶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다음번엔 배려, 그게 설령 의전일지라도 보태겠다 하는 것입니다.


골프는 시작부터 끝까지 배려다. 이 부분 명심하고, 배려는 사람마다 보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할게 많아지네요. 역시 골프는 레저로서의 골프가 좋습니다.


첫 문장을 수정해야겠네요. 

레저로서의 골프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덧) 그리고, 배려 없는 골프에도 지갑을 열지 않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멋진분들!>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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