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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황 Jun 26. 2022

오밤중에 할아버지가 보고싶다고?

기쁜데 부럽다. 부러워서 슬프다.

목도 못 가누던 아기는 태생부터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것이 분명하다. 옹알이도 못하는 신생아는 할아버지만 앞에 오면 팔다리를, 특히 다리를 사방팔방 흔들어대며 반가움을 표현했었다. 남편과 아내를 포함한 온 가족은 그 모습이 신기해 몇 번이고 테스트를 했었고, 어김없이 아기는 할아버지 앞에서 사지가 멀쩡함을 자랑했었다.



31개월이 꽉 차가는 우리집 작은인간은 여전히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아내, 아기의 엄마가 1순위, 2순위는 '하비'이며, 3순위는 이모님이고, 남편은 10위권 안에 들 수 있으려나 싶다. 아기의 기분에 따라 변동이 큰 4순위권 이하는 굳이 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남편이다.


아기의 탄생에 행복이 넘쳤던 아기의 할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 신생아실, 조리원 면회실, 아기 냄새가 가득한 남편과 아내의 집에 매일같이 방문해 얼굴도장을 찍었다. 100프로 출석률을 자랑한 하비를 아기가 믿고 따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고, 아기의 출산만으로도 효도는 다 했다고 느꼈던 남편이었다.


그러던 아기가 오밤중에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아련하게 말했다.


"아기 하비 보러 갈래"


평상 시라면 보러 갈 수 없는 이유를 열 가지도 들어가며 빨리 자라고 했겠지만, 그날만큼은 아련했던 아기의 발언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미 출산만으로도 효도는 다 했다지만, 남편은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아기가 고마웠기에 자고 있는 아기 할아버지의 전화벨을 울렸다.


"우리 갑니다."


아기의 할아버지는 잠투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는 중 잠이 들면 그냥 돌아가라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기를 본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상기된 아버지의 말투를 들은 남편은 카시트에 몸을 기대 졸기 시작하는 아기에게 말을 걸어가며 아기의 할아버지를 향한 오밤중의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엔진의 떨림에 꿈나라로 갈 뻔한 아기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넘쳤다. 아기스런 말투로 실컷 떠들며 할아버지와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했다. 당연히 아기는 더 놀겠다 했고,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남편과 아내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엄마아빠는 이제 갈 거야. 아기는 계속 있고 싶으면 할아버지랑 자."


울며 보채는 상태로라도 데려가겠다 마음을 먹은 부모가 던지는 마지막 수단이었지만, 아기는 남편과 아내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그래" 하고는 아내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아내는 그 포옹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이별을 고할 때 하는 포옹이었다. 아내와 남편은 당황했다.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엄마와 떨어져 자겠다는 아기의 반응은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기의 할아버지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기는 차에 타 드라이브를 떠났다. 별을 보러 간다는 핑계로 아기를 재우기 위함이었다. 이내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아기는 눈을 감았고,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으로, 남편과 아내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아기를 잠자리에 뉘인 남편은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해주는 아기가 한없이 이쁘면서도, 자신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찾는 아기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엄마만 찾는 시기가 도래하여 아빠를 배척하는 아기였기에 한 번쯤 아기의 사랑을 독차지해보고 싶은 남편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기는 눈을 뜨자마자 할아버지를 찾았고, 옆에 없다는 사실에 속았음을 인지했다. 이는 곧바로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으며, 남편은 또 한 번 점수를 잃었다. 고민 끝에 엄마아빠 대신 하비와 자겠다고 내린 아기의 결심은 진심이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아기의 바램을 묵살해버린 남편과 아내는 한동안 아기의 울음소리와 대치를 해야 했다.


남편은 점수를 잃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에는 아기의 용기 있는 결정을 지원해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면 대체 언제쯤 아기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순위권 안에 들고 싶은 남편이었다. 왠지 조금은 서글퍼졌던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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