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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Jun 19. 2017

버티기와 당기기를 읽고 한마디...

48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2016년도에 48권을 읽었음에 비하면 2017년은 아직 반도 가지 않는 시점에서 제법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시간의 할당이라는 정량적인 측면이 강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평이 이 책 말고도 한권이 더 있으니 미루지 말고 마음이 생길때 정리를 해보려 합니다.



책의 표지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지위싸움의 심리학'



'우리는 항상 어떤 지위를 차지한다. 지위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지위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위는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을 결정하며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지도 결정한다. 지위는 늘 새롬게 설정되어야 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접촉하면 곧바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지 위한 다툼이 불가피하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연애가 다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가 싸우기를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지위싸움은 반드시 일어난다. 대개의 경우 몇 초 만에 할당된다. 지위는 유동적이다. 사람들 사이에 지위 차이가 작을수록 지위싸움은 더 자주 일어난다. 일단 각자가 선호하는 지위를 자동적으로 채택하고 나면, 우리는 절대로 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나중에야 똑똑해진다.'

사실 이런 글을 보면 긴 시간 급생활자의 입장에서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그와 관련이 있는 내용임에도 이상하리 만큼 책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위에 쓰여진 내용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같은 이야기의 반복으로 보여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의 주된 내용은 그렇습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위치를 택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즉


'존중'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동료애'를 받을 것인가?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위를 얻기 위한 싸움에서 중요한 것이, 내면으로의 높은 낮음, 외면으로의 높고 낮음을 택함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지위싸움에서 이기려면 결국에는 '높은 내면과 낮은 외면'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매사에 전략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이가 바로 이런 측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가 '존중'과 동료애를 전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은 의문이 가는게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존중'과 '동료애'는 상대적인 극에 위치하기에 동시에 두가지를 다 얻는 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와 타의 동시 만족이라... 글쎄 어려워 보입니다. 파이는 정해져 있고 누구가는 그 파이를 가져가고, 그 대상을 없어지는 파이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그 속에서 동료애가 살아넘칠지는 의심입니다. 물론 그것이 기술일 수는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머리속에서는 그간의 생활들이 참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 '존중'을 요구했으면, 혹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진실된 '동료애'를 요구했으면 어땠을까? 등의 물론 이미 엎지러진 물이지만 상황 상황에 따른 대처를 달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긴 했습니다. 책의 진도에 있어서 위에서 말했던 듯이 지루하고 의미성 부여는 힘이 들었지만, 활용도의 측면에서는 직장이나 모임 혹은 가정에서도 효용가치는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위치를, 그것도 내가 원하고 가지려는 위치를 명쾌하게 파악하고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물론 정독까지는...  



'패배하는 사람보다 항복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 글은 어떤가요? 패배가 힘이 더 들까요? 항복이 더 힘이 들까요? 글쎄 두가지 다 힘이 드는 것은 기정 사실이겠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자와 그렇지 못한자와의 갭이 바로 패배와 항복의 차이가 아닐까는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이기 보다는 후자가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항복하는 자는 항상 최선을 찾지 못하고 차선에 머물며, 결과에 대한 시간의 할애보다는 변명에 대한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자가 아닐까요? 그리고 보니 패배하는 자는 승복할 수 있는 자이고, 항복하는 자는 승복을 할 수 없는 자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회사의 문화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좋은 평가 놀이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사장이 좋은 평가 놀이에 능숙하지 않으면, 그 놀이는 회사전체에서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 회사는 어쩔 수 없이 부정적으로 변형된 좋은 평가 놀이가 벌어진다. 다시 말해서 직원들이 언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그런데 왜 도움을 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주로 이루어진다.'



회사의 정체성의 귀인은 역시 그 회사의 창립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임에는 항상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률이니 이타적행동이 없다는 등 혹은 직원의 조직몰입이 이루어 지지 않음을 항상 탓하는 분들이 있으니 다시금을 이 글을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역시 만고 불변의 진리, 즉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막고 정화하여 조절하는 장치만 제대로 있다면 어쩌면 아랫물의 맑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문제는 조절장치의 제대로 된 활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이...



'지위놀이 솜씨는 직장생활에서 어떤 지위를 추구하든 상관없이 대단히 중요하다. 낮은 지위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승진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도전에 직면한다. 모든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다.'



 글쎄요. 일반적인 피라미드구조의 조직에서 존중을 배제한 동료애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자본주의의 시대에 있을 수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암튼 중요한 것인 컨셉은 있어야 조직에서의 버티기는 유리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랬던듯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존중을 어는 순간에는 동료애를, 그러다 보니 존중과 동료애가 함께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곤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보니 리더십 상황이론이라는 것이 굉장히 일반적인 조직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다 싶기도 합니다. 이런말을 듣기 쉬워질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거야'



 암튼 이상하리 만큼 집중이 되지 않은 채 읽었던 책으로 시간도 생각외로 많이 잡아먹었던 책입니다. 임팩트의 부족 정도로 평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현실에 즉, 내 직장생활에 가정에 모임에 연애에 활용을 하면 어쩌면 내가 원하는 지위를 좀더 쉽게 얻어낼 수 있는데는 도움이 될 듯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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