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네이트 Jul 25. 2017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을 읽고 한마디...

50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문득 '밸런스'라는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도,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모든 일상이라는 것이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왠지 근래에는 나름의 균형감의 유지속에 무엇인가가 그 균형감에 약간의 균열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우문현답,


1등 기업의 법칙, 역경의 심리학,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을 읽고 한마디를 남기지 못하는 현실이 그 균열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균형이든 균열이든 그 원인자는 자신이기에 다시금 맘을 다스려 더위와 함께 비롯된 균열을 더듬에 균형이라는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철학적 사유는 대체로 다섯 단계로 구성된다. 그것은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철학), 철학은 현실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가(인식), 이런 인식을 토대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규범적 방향은 어떤 것인가(도덕), 이러한 가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정치), 정치는 가연 우리의 고유한 삶을 보장하는가(삶) 하는 다섯 가지 문제들에서 비롯된다. 물론 독립적인 문제는 없다. 문제는 항상 다른 문제들과 연계되어 있다'

 

'어떠한 학문도 -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사회과학도 독일 통일과 동구권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했으며, 또 어떤 자연과학도 환경 오염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사회의 불투명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야기하는 의미의 공동화현상과 방향의 상실을 보완할 수 없다. 만약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 방향 상실은 바로 철학 부재가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문명의 압박에서 오는 심리적 과부하와 정신적 불안,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개인의 행위를 획일화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이것이 바로 야만을 극복했다고 착각하는 문명이 만들어놓은 야만이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느낌은 사실 접함에 있어서의 가벼움을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웬지 강신주와 같은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한 책이 아닐까하는, 그러나 책은 전혀 생각하던 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금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단순함과 빠름, 쉬움'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을 통과해서 나와 유아기와 청년, 중년, 장년을 거치면서 살아가는 생속에서 우리가 단순함과 빠름과 쉬움으로만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하는... 문득 이제 고등학생인 아이한테 세상을 단순히 그렇게 살면된다고 말하기는 쉬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중화와 전문화의 차이에 대한 부분도 역시 그와 깊은 관련이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작은 대중화를 통한 접근의 방식으로 그리고 심오함에 대한 것은 전문화의 관점이라는 어렵고 느리면서 복잡함에 대한 접근 역시도 필요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은 대중화의 니즈에 맞춘 것이라기 보다는 전문화의 니즈에 맞춰진 책인듯 싶었습니다.

 

또한 지상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의 다섯가지 사유를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철학-인식-도덕-정치-삶'을 봐도 명백해 보입니다. 즉, 철학자의 사유라는 것은 사회적 니즈에 부합된 사유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에 대한 풀어가는 방식에는 철학자 나름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니즈에 부합된 방식을 제안한다는 차이만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구요. 물론 이것이 지상으로 내려온 이상 단순히 그 몫이 철학자에 한정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가만히 세상을 내려다 봅니다. 어쩌면 세상을 인간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스럽게 생각이 들게 됩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단순히 '세상과 인간'이 아닌 '나'에 갖혀 살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에 대한 사고의 틀이 이로 인해서 벗어나게 되는 듯 싶기도 합니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습니다.

 

환원주의가 4차산업혁명의 시대의 불확실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비관적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만으로는 절대 21세기 혹은 현재 이후의 시기에 대한 적절한 값을 제시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가만히 보면 역사의 발전 혹은 과학의 발전도 과거의 부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정답이 부서질때 누군가는 노벨상을 타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의 어는 시점에서는 바보로 멍청이로 비난을 받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것은 반드시 그렇다가 아니라, '이 시점까지는 그렇다'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문명의 압박에서 오는 심리적 과부하와 정신적 불안,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개인의 행위를 획일화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이것이 바로 야만을 극복했다고 착각하는 문명이 만들어놓은 야만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유라는 것이 바로 '자기만족적 자유', 그것도 획일화속에 진행된 만족적 자유라는 것에 사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승리라는 도취된 문명적 횡포하는 것, 사실 가만히 보면 작금의 경제현실이 그런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너무나도 그것이 옳다고 주입이 되다보니 우리는 그 외의 사실을 볼 수가 없게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제는 바닷가에 쓰여진 모레의 낙서를 지우고서 새롭게 생각하여 그림을 그릴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빙산의 잠긴 부분에 대해서 명쾌히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그 일각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까요?


철학적 사유... 어떨까요?



작가의 이전글 CEO, 책에서 길을 찾다를 읽고 한마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