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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Aug 29. 2017

21세기를 지배하는 문화의 키워드를 읽고 한마디...

58번째로 읽게되는 책 입니다.

 

'21세기 키워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예술상상력'이라고 대답했다. 문화, 예술적 상상력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서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모색하는 것뿐아니라 과거 밀레니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책은 '강요된 모순'속에서 구상되었다. 그러나 그 강요된 모순을 '해방된 모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자 의미일 것이다'

책을 읽은지도 제법되었고 읽는 중에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마디를 쓰면서 '책머리에'를 읽어보았습니다. '예술적 상상력'과 '해방된 모순'... 


이 책이 쓰여진게 2001년 2월 25일이니, 16년이상 지난 책 입니다. 반 세대가 더 지난 시점에서 다시금 21세기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다지 큰 차이가 있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현재, 즉 2017년 8월 말의 시기에 더욱더 필요시 되는 것이 바로 그 '예술적 상상력' 과 '해방된 모순'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이 책을 읽었을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일 먼저 머리에 드는 단어가 바로 '미학'이었습니다. 지인에게 미학이 뭐야?. 그리고 '미학'이라는 것이 보는 관점의 차이가 명백할 것인데, 그 속에서 일반화가 가능한지 역시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왔습니다. 먼저 미학에 대해 잠깐 이해도를 높이고 싶어집니다.

 

"미학의 체제[편집]"

 

미학의 특성상 개별적인 부분을 다루기 쉽기 때문에 굳이 체제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미학에도 체제가 존재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보편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학은 그러한 보편성의 원인을 밝히는 것을 기본으로, 그 체제를 특정해 밝혀낼 수 있으며 이렇게 밝혀낸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구조를 축조해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학적 체제를 구축한 헤겔의 경우에 미학이란 세계 속에 던져진 정신이 실현되는 과정이 새겨내는 결과물이었다. 이는 다른 모든 미학적 체제에도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설명이기도 한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특정한 목적의식을 배후에 숨기고 있으며, 그것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그 영화는 사람들이 시대를 겪어나가면서 느껴왔던 감각들을 상징과 서사를 통해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를 통해 삶으로 되돌아오는 감동을 느낀다. 영화 올드보이의 예를 들어 보자.

올드보이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갇히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풀려난 이후에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안타고니스트의 내면적 갈등을 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 과정은 뭔가를 상기하게 만든다. 독재를 겪고(갇혔다가) 해방되지만(민주화를 경험하지만) 그 이후에는 미리 마련된 장소로 유도 된다(민주국가에서의 정해져 있는 국민의 삶으로 유도된다). 이 밖에도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미학에서는 이러한 과정 자체를 이런 식으로 체제를 통해서 정형화되는 과정으로서 판단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인 형식의 배후에는 산업 체제를 형성하는 역동과 그 역동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대상화하는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판단해내기 위한 기준이 바로 미학이며, 미학은 그래서 늘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미학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미학에서 말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보편성을 전제한다'라는 것에 대한 보편화를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주관화를 통한 대중화'가 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에 너무나 많은 미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지라 일단 살짝, 하지만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책은 신변잡기의 이야기, 물론 저자에게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겠지만,를 기반으로 그 속에서 혹은 기반으로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로의 전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묘한 매력에 책을 내리기도 집중해서 읽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사를 이해하여 내 것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작가라면 쉽고 빤한 글은 결국 세상사를 단순화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것인가?...


요즘 반응은 좀더 과대, 피해망상적이다. 나도, 내가 써놓고도, 나 스스로 어려워서 내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려고 노려하는 과정을 밟는 경우가 많다'


​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글에 대한 호연지기를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을 떠나 내재화를 통한 사유를 기반으로 무엇가는 강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을 읽음에 있어서의 기쁨은 덜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시를 쓰는 작가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더욱 커지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음미를 통한 내재화를 드러내 산산조각을 내고 마는 아쉬움이야 말해 무엇할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평가의 직업이 좋은 직업은 아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무엇가 끄적이고 싶을때, 혹은 끄적일때는 그때 바로 그 당시의 개인의 사유 혹은 단지 느낌일 수 있는데, 그것이 분해되고 해석되는 것이 하는 자도 혹은 당하는 자도 기쁘지 않을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

책을 쓴다는 것은 1차적으로 독자를 둔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만 알고 나만이 간직하고 싶다면 일기로도 충분한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문화의 키워드는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부분에는 적극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책을 통한 예술적 상상력의 배가는 이루어 지지 않았던, 지식의 양의 비 대칭성속에서도 쉽지 않았던 주변에만 머물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숨겨진 의도일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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