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by 성지연


좋아하는 영화 <윤희에게>에서 쥰의 고모 마사코는 두어 번 이 말을 한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언젠가 눈이 엄청 많이 내리는 계절에 그곳에 꼭 가고 싶었다. 사람 키보다 높다랗게 눈이 쌓여있는 곳, 집들마다 지붕 두께만큼 눈으로 뒤덮여있는 곳, 도톰한 목도리와 장갑, 따뜻한 털부츠를 신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곳, 마을마다 곳곳에 작은 스키장이 있다는 곳, 겨울에는 유명한 눈꽃축제를 하는 곳, 두어 번 보니 이제야 진정 아름답게 느껴진 러브레터 영화에서 오겡끼데스까아아아아를 외치던 곳.



삿포로에서 내렸다. 누군가에게 삿포로에 갈래요? 라는 말은 고백이라고 했다. 그만큼 눈이 많이 오는 고장이라서, 우리나라로 치면 섬에 갔다가 못 돌아오는 클리셰 같은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도 섬보다 뭔가 이국적이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삿포로에는 눈이 없었다. 거리의 풍경도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눈 구경을 하려면 차라리 한국의 울릉도에 우데기를 보러 가거나 북유럽 쪽으로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생각했다.



삿포로에서 눈이 오지 않는 몇 밤을 보내고 오타루로 가는 날이었다. 두 번째 밤부터 밤새 눈이 오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끌고 기차를 타러 가는데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열차의 맨 앞 칸, 기관사님이 운전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칸 입구 쪽에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를 헤치며 열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야말로 설국열차다, 우리는 열차 맨 앞 칸에 탄 거야 하면서 웃었다. 미나미오타루에 있는 오르골당에 꼭 가보고 싶은 일정이었는데 그곳은 6시까지만 연다고 했고 시간은 어느덧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구경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차 아니었다.



오타루에 도착하기 다섯 정거장 전부터 갑자기 기차가 멈추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온다는 이유였다. 언제까지 멈춰있을지도 모르고, 언제 갈지도 모르고, 언제 도착할지도 몰랐다. 더 놀라웠던 것은 열차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그러려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왔을 때의 고요함을 무척 좋아하는데, 기차 안에도 너무도 조용해서 우리가 소곤대거나 웃는 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이었으면 벌써 시끌벅적 했을 텐데, 자연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과 겸손함을 알고 있는 고요함이랄까. 지정좌석이 아니고 사람이 많이 있어 열차 칸마다 문을 열어두고 정차하고 있었다. 정말 그토록 한 곳에서 오래도록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것을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렇게 많이 눈이 계속 계속 내리고 또 쌓이고 내리고 쌓이고 나리는 것을 볼 줄이야.



기관사님은 내려서 뒤쪽으로 오더니 말을 걸었다. 일본어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쓰와 스미마셍밖에 모르기에 알아듣고자 무진장 애쓰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한국어에 익숙해 보이는 일본인 분께서 감사하게도 도와주셨다. ‘급히 가야 하는 일정이라면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거나 다시 삿포로로 돌아가는 것을 권장합니다. 언제 열차가 다시 출발할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전해주셨다. 저는 오타루로 가는 일정이라고 하니 ‘아…’ 하더니 열차 뒤쪽 칸 지정석 쪽에 빈자리에 앉아가는 것을 권장해 주셨다. 입구에 서있으면 추울 것이라 하시면서. 너무도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고요히 쌓이는 눈처럼 고요히 앉아 밖을 보았다. 어떤 분은 정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열차 문 밖으로 나가 기찻길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관사분들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하게 한참이나 눈을 치우셨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풍경처럼 앉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생활이 되는 것이, 누군가에겐 낭만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 어느 누군가에겐 재난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활과 낭만, 아름다움과 재난은 같이 오는 것인가 생각했다.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어쩔 수 없는 것, 그리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기다림에 대해 생각했다. 스노우볼 안에서 눈이 내리는 밖을 보는 느낌이었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오르골당에 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글, 사진 | 성지연 2023.1.10.

* 제목은 <설국>의 첫 문장을 빌려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