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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진 Sep 29. 2023

너를 다시 만난다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해 3


어느덧 술자리가 무르익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진실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남녀가 취기를 빌려 호감을 주고받는 바람에 분위기는 핑크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땐 아직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이방인인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곧 질문자로 패딩 홍보 대사녀가 뽑혔다.

너는 오지랖 넓고 예의 없어 보이긴 했지만 얼굴만은 반반했기에 모두 관심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네가 검지손가락으로 내쪽을 가리켰다.

그 순간 대꾸도 안 하겠다던 나의 다짐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고 , 모두의 오~라고 하는 소리는 내 표정을 숨기는 것을 더욱 방해했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집중한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 키 170도 안 되지?”였다.


‘... 잘못 들은 건가?’


여기저기 피식 거리며 재차 물어봐준 덕분에,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너는 못 믿겠다며 나에게 다가왔다. 기어코 나를 일으켜 세운 너는 자기 키와 비교하고 나서야 인정하더니 그대로 슬쩍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왜 여기 앉냐며 싫어했지만, 그 뒤로는 너와 하루종일 투닥거리며 같이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친구 말로는 그때 너와 난 되게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술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진탕 마셔댓고, 모두의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 첫 번째 낙오자가 아마 나였을 거다. 정신을 못 차리던 나는 지갑도 두고 간 채 홀로 밖을 나섰고, 핸드폰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차로도 30분 거리의 집을 걸어가려고 했던 걸까?.


그렇게 집에 갈 방법도 없이 거리로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눈을 맞으며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 부린다고 입은 코트가 원망스러웠고, 외면했었던 패딩이 눈에 아른거렸다.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던 그때, 공중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그 안에 들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몸을 덜덜 떨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격하게 흔들었다.


“야! 너 왜 여기서 자!”


나를 깨운 건 다름 아닌 너였다. 예상치도 못한 꿈만 같은 상황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제야 몸은 아직 덜덜 떨렸지만 정신을 차리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고, 종각역이라는 너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우리가 술을 마시던 곳은 종로 3가였다.


나를 찾아낸 것이 신기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았더니, 너는 날 찾지 못하면 밤을 새우고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설마 진짜 밤을 새울 생각이었겠어? 싶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5시가 넘었었다.




우린 성인이 되고 난 뒤 처음으로 호감을 느낀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얼마뒤 너는 나에게 둘이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렇게 너와 단둘이 술집에 앉았다. 극도로 긴장됐다. 나는 짬뽕탕 국물이 옷에 묻은지도 모른채 뚝딱 거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음식이 옷에 묻는다면 '에이씨.. 이거 지워지려나?'부터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이미 벌어진 일인 것도 알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하루종일 신경 쓰며 스트레스를 받는 부류였다. 근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야! 너 옷!! 아 진짜 더럽게 흘리고 그래, 이리 와봐... 사장님! 여기 퐁퐁 있어요?"

 

너는 이게 최선이라며 옷을 다 닦아주고 나서도 자리로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너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얘는 은근슬쩍 내 옆에 잘 앉는다고. 나는 평소에는 짜증 나고 신경 쓰이던 오물이 왠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적극적이고 화끈한 성격이던 너는 얼마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하지만 겁쟁이던 나는, 무슨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너였기에, 한 발자국 다가가기보단,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친구일 뿐'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한 뒤, 너와 여러 번의 만남을 이어갔지만, 그저 친구로서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너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직설적인 어투로 다시 한번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나의 친구라는 여전히 비겁한 대답을 듣고 나서는 무장을 해제한 채 재밌게 술을 마셨었다.


그게 너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됐다.


나중에 친구에게 “걔 대구 내려갔다더라”라는 소식을 끝으로 시간은 1년 정도 흘렀고, 나도 너를 거의 다 잊었었다.


‘잊었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묻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이 뜸해졌던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친구는 곧 너의 대한 말을 꺼냈다. 네가 기억나냐는, 혹시 한번 볼 생각이 있냐는 친구의 말에, 잠자고 있던 모든 세포들이 일순간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20살 때 내가 아니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너를 오랜만에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음...”이라는 아주 잠깐의 침묵 뒤로 너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었다.


“제주도에서 택시의 불법유턴이…”


뭐라 뭐라 떠드는 수화기 너머의 나는 1월 1일 새벽,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보다 훨씬 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너를 오랜만에 보러 가는 날은 7월 말이었다.


너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들뜬 마음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들었다.

너의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하면


"너 만난다고 멋 좀 부려봤어"


라며 인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는 그런 나를 보고선


“날도 더운데 코트 입고 안 덥냐?”


라고 말해주려나?


그래도 오늘은


“다음부턴 패딩 입고 다녀”


라고는 못 하겠네, 생각하니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사실 너를 처음 봤던 순간부터, 네가 내심 따뜻한 사람인 걸 진작 알고 있었다.


혼자 겉도는 내게 반말을 하며 먼저 다가와준 네가 좋았고, 내 기분이 나빴을까 봐 코트를 입고 온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다닌 것도 고마웠다.


네가 환하게 웃으며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던 순간,

진실게임에서 황당한 질문을 받은 순간,

네가 날 공중전화박스에서 찾아낸 순간,

나는 모든 순간 너를 많이 품고 있었나 보다.


다음생이 있다면, 너를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고마웠다고,

사실 난 처음부터 네가 많이 마음에 들었다고, 이제야, 지금에서야

"네가 좋긴 한데.."라고 말하기보단,

"네가 너무 좋으니까 잘해줄게"라고 말해줄 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하지 못한 내 마음을 가감 없이 다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무거운 내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은 잿빛이었다.


“비가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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