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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an 03. 2020

번역가의 과제

정용준「선릉 산책」

  「선릉 산책」의 주인공 한두운은 지적 장애인이다. 이 간단한 사실로부터 문학의 영원한 숙제가 주어진다.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한두운이 쓰는 언어는 앞뒤가 맞지 않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 「선릉 산책」에 쓰여진 정갈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한두운의 것이 아니다. 화자의 언어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한두운의 언어로 쓰여진, 아마 “밥, 밥, 화살나무, 자귀나무, 전나무...”, 이런 식으로 이어질 소설을 쓰는 것에도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처리하며,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영원히 침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한두운의 언어는 다르다. 마치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다르듯이 다르다. 그러므로 ‘번역’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두운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번역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번역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직역과 의역. 직역은 원 텍스트에 중점을 맞추어 글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다. 의역은 번역자의 언어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이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한두운의 언어로 직역할 것인가 우리의 언어로 의역할 것인가.

  그러나 직역과 의역이라는 이분법은 결국 언어들의 차이에만 머무르게 된다. 물론 언어들의 의미는 다르다. 한국어 ‘빵’과 프랑스어 ‘pain’은 다르며 각각의 언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형상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의미는 다를지라도 그것들이 의도한 것은 같을 수 있다. 한국어 ‘빵’, 프랑스어 ‘pain’, 영어 ‘bread’, 일본어 ‘パン’...... 수없이 드러나는 언어들의 차이를 나열하다보면 희미하게 무언가 비슷한 것이 의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그것을 ‘순수언어’라 불렀다.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를 순수언어를 향한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실 순수언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환상으로 구성한 것이다. 벤야민 또한 순수언어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으로서, 환상으로서 존재하는 순수언어에 대한 열망은 영원한 과정 속에서 실천적인 효과를 만든다. 그런 불가능한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가 아닐까. 그것은 직역으로 의역을 심화하는 것, “외국어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해서 불가능한 순수언어로 향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차이를 통해 자신을 확장시키며, 타인을 이해하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가는 것이 우리의 윤리가 아닐까. 한두운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에 기입하려는 소설 속 ‘나’의 모습처럼 말이다.

  고작 하루 만에 한두운의 언어가 ‘나’의 언어를 바꿔놓았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열두 시간동안 같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하고 묻는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우리는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나’는 한두운처럼 “오른쪽 주먹을 가볍게 쥐고 오른쪽 광대뼈를 툭, 때려봤다.” ‘나’는 한두운의 언어 중 단어 하나를 배우고 쓰게 되었다. ‘나’의 언어는 확장되었다. 동시에 ‘나’의 이해 또한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 또한 한두운처럼 “왜 인상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버려진 매듭, 돌 위에 올려져 있는 돌, 한쪽이 부서진 이어폰”을 세심히 관찰하며, 이름 없는 나무들의 이름들을 하나씩 부르게 되지 않을까. 언어는 우리의 한계이지만 동시에 한계 너머를 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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