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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Apr 15. 2020

윤리는 '피'다

정용준, 당신의 피

  선악에 대해서라면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 있다. 약한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1920년대 카프 비평가들은 그렇다고 생각했고,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으며,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생각되는 면이 있다. “죽은 나무처럼 앙상한 몸피와 어두운 낯빛, 볼록한 아랫배와 기형적으로 돌출된 팔뚝의 혈관”을 가진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연민의 감정을 가지기 마련이며, 그가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형편없이 마르고 의기소침한 그의 모습을 보니 그가 아내를 단칼에 죽였던 살인자라는 사실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착각이다. 아버지는 아내를 단칼에 죽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신장병은 아버지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고 살인은 아버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윤리의 문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주어져야 한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다.

  이에 반해 ‘나’는 착한 사람이다. 고아라는 상황은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 고아로 태어났음에도 양부모와 큰 문제없이 지낸 것과 병실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해보려고 하는 노력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윤리적으로 옳은 것을 선택했다.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를 타인으로서 대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나쁜 선택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다섯 살에 아버지와 이별한 그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추억도, 동시에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버지를 외면하는 것이 윤리적이다. 종신형을 받은 살인마를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싸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그와 맺고 있는 혈연을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거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는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과 고민”이 생겨나고 그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입장을 부정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와 아버지가 공유하고 있는 피가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것이 그를 지배한다. 그리고 모든 중요한 윤리적 문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것에 있다. 그가 일하는 병원의 환자들은 어쩔 수 없는 것에 평생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우울하다. 그는 투석실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려 한다. 하지만 되지 않는다. 그는 환자들과는 다른 위치, 어쩔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병실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끝없는 반복의 연속”속에 살지만, 그 반복을 즐겁게 생각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투석실의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신장병에 걸린 사람들은 “먹어야 살지만 동시에 먹으면 죽는다.” 이러한 ‘산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합리적인 태도는 최대한 적게 먹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과도하게 먹는다. 우리는 합리적인 이유로 살거나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합리적인 이유라는 것은 투석치료와 같이 근본적 치료가 아닌, 일시적 치료에 불과하며 정작 삶을 추동하는 힘은 일시적 치료의 반복 속에서의 불가해한 과잉에 있다. 식욕과 유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조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조건은 단순함을 초과하여 그 이상의 의미를 발휘한다. 식탐과 혈연은 한계를 초과하는 한계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라는 말은 유전자를 넘어 혈연으로 그에게 다가왔고 그의 감정을 움직였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그가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다만 그의 움직임이란 대상이 대상을 초과할 때, 개인의 유전자가 사회의 혈연이 될 때, 정확히 말하자면 유전자를 혈연으로 ‘그가’ 간주 할 때 가능하다. 윤리는 ‘피’다. 개인으로서의 빨간 액체가 아니라 관계로서의 혈연이다. ‘신장병’이라는 열악한, 어쩔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는 아버지에게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망했다고 말하는 건 쉽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합리적 환멸이 불가해한 정열로 바뀔 때, 윤리적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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