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문상
‘슬픔’이라는 말은 ‘슬펐다’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지만, ‘우울증’이라는 말은 그럴 수 없다. 이는 슬픔이 형용사를 명사화한 단어고 우울증은 원래 명사인 단어라는 문법적 차이 때문이지만, 두 단어가 주는 어감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확실히 매듭짓고 종결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울증이라는 증세는 그렇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슬픔은 애도될 수 있으나 우울증은 애도될 수 없다.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로 옮겨”오지 못할 때 생기는 증세가 우울증이다. 슬픔, 애도는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고 대상을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대상을 잊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현실 논리에 있어 나쁜 쪽은 당연히 우울증이다.
장례식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실을 인정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애도의식이다. “경황이 없는 상주를 짧게 일별하고 오는” 의식,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잊기 위한 의식이다. 매사에 우울한 희극배우는 그 애도의식을 거부한다. 강제로 요양병원에서 죽은 아버지가 부당하게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업무적 관계에 불과한 ‘송’을 붙잡고 “아버지를 잃어봤습니까?”, “아버지는 치매였을까요?”하며 아버지에 대해 반복해서 묻는다. 이에 화가 난 송은 이렇게 말한다. “죽은 분은 죽은 분이시고 산 사람은 살아야죠. 정신을 똑바로 차리세요. 무엇보다 생활을 단정히 하세요.”
희극배우는 ‘헤어진 사람은 헤어진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송에게 헤어진 ‘양’을 상기시킨다. 송은 이미 끝나버렸다고, 애도했다고 생각했던 양과의 관계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양에 대해 희극배우에게 물어보게 되고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송이 화내듯이 웃게 되는 것은 희극배우가 자신과 양이 “조용히 우는 사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다. 송은 몰랐지만 양은 “조용히 우는 사람”이었다. 크게 한번 울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울면서 질질 끄는 사람. 송이 크게 한번 울고 양을 잊어버리려 했다면, 희극배우는 조용히 울면서 양의 곁에 있으려 했다.
송은 자신이 우울을 달고 사는 희극배우처럼 될까봐 두려워한다. 송은 그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쁜 것은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확실하게 지우고 잊지 않는 것이 정말로 나쁘기만 한 일일까. 잊는 것이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상실이 있다. 송의 조모의 죽음 같은 상실이다. 서로 부양을 미루다가 결국 죽은 조모의 장례식에서, 먼 익명의 친척조차 ‘우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아버지는 잊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우울증은 송에게 폭력적으로 드러난다. 이 경험은 송에게 조모의 죽음을 기억하게, 잊지 않게 한다.
송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다시는 만날 수 없는지 궁금”해서 양에게 전화를 건다. 잊지 말아야할 관계를 잊지 않게 된다. 송은 문득 내가 나빴지,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쉽게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며 진정한 속죄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않는 것,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상은 희극배우의 불운을 위로하기 위해 간 것이지만 송은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음”을, 잊혀지지 않고, 잊지 않아야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의 문상은 희극배우의 관객참여형 연극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