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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an 03. 2020

인간이라는 동물

김언수 「존엄의 탄생」, 윤고은 「평범해진 처제」

 인간 또한 동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그럴 때면 김훈과 같은 작가가 나타나 인간은 먹고 싸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김훈처럼 처절하게 허무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인간이라는 게 “밥 먹고 잠 자고 떡 치”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두 소설이 있다. 「존엄의 탄생」과 「평범해진 처제」다. 두 소설은 “인간의 정확한 크기”,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싸늘한 진실”에 대해 말해준다.

 「존엄의 탄생」의 ‘그’는 영화감독의 꿈을 가진 한량이다. “이래봬도 예술 하는 사람”인 그는 “평생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노예의 삶”이라 말하며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편의점에서 맥주와 천하장사를 먹으며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동물이다. 개에게 수치심을 느끼며 개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이미 그가 비열하고 지질하며 하찮은 존재임을 증명한다. 그는 노예의 삶을 운운하지만 사실은 즉결재판 판사처럼 ‘안전한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존재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천하장사를 바라보며 순종적인 모습으로 기다리는 쫑끼의 모습이 곧 그의 ‘싸늘한 진실’이다.

 「평범해진 처제」의 화자는 두 공간에서 두 가지 글을 쓴다. 카페1에서는 소설을, 카페2에서는 야설 같은 리뷰를 쓴다. 그녀는 “두 개의 자아로 각기 다른 글을 쓴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카페1에서 그녀는 우아한 사람이고 카페2에서 그녀는 성욕밖에 모르는 동물이다. “두 카페는 걸어서 5분 거리”이지만 “간판도 출입문도 다르니까 헷갈릴 일은 없”다. 그녀는 동물로서의 의무, 즉 먹고 살기 위해 야동 리뷰를 쓴다. 야동 리뷰를 쓰면서부터 그녀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졌는데, 야동의 세계에는 “야동이야 기능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라며 어떤 수식도 없이 단지 성욕만을 말하는, 뻔한 남자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즙을 좌우하는 것도 결국 고기나 불이 아니라 같이 먹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거거든. 섹스도 마찬가지 아니겠어?”라고 말하는, “소년 같은 면”이 있는 표고영에게 그녀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표고영을 통해 단지 성욕만이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존엄’같은 게 있는 세계를 꿈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성적 신호를 다큐로 받아들이는 표고영의 어리숙한 면도 그녀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런 그녀에게 표고영이 보여주는 건 섹스 장면, 그 자신의 섹스 장면이다. 섹스에 대해 관심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던 남자가, 그것도 과거 자신과 사귀던 시절에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그녀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은 그녀가 한동안 카페1로 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 또한 성욕을 가진 동물이다, 라고 결론을 짓기에는 남는 것이 있다. 표고영은 “좋아하는 감정이 섹스에 드러날 수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다. 민아와의 섹스 장면을 보여주며 민아가 느끼는 지를 묻는 게 아니라, “저 여자가 저 남자를 진짜 좋아하는” 지 물어본다. 섹스는 인간이 하는 가장 동물적인 행위이지만 오히려 그런 동물적인 행위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고유한 감정, 사랑이 겹쳐진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한 편이 카페1과 카페2의 구분 없이 완성”될 수 있었다. 우리는 “줄거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뭔가 있을 것 같았지만 그저 그런 느낌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이 싸늘한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싸늘한 진실에다가 온갖 낭만적인, 인간적인 환상을 투여한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매커니즘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물이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인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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