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나 같으면 더 그럴듯하게 썼을 텐데.”였다. 책 표지의 핏자국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죽는다. 너무 많이 죽는다. 적당히 죽으면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이 들지만 이렇게 과도하게 죽으면 혐오나 공포의 감정이 생긴다. 가령 <폭염>에서 주인공의 남편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고, 딸과 주인공은 낙태를 경험하고, 딸은 결국 자살하고, 주인공은 따라 죽겠다고 결심한다. <부고>에서는 주인공의 생모가 평생 혼자 살다가 죽고, 오빠는 사고사하고, 아버지는 자살한다. <아름다운 것들>에서는 일가족이 모두 죽는다. 자살미수쯤으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김이설은 모두 죽이거나 죽음 직전까지 보낸다. 군대 선임이 김이설의 다른 소설인 경장편『환영』을 읽고 세상에서 이런 일은 굉장히 드물게 일어나는데 작가가 과장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많이 등장하는 서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전쟁영화나 첩모물에서는 수없이 많은 인물이 죽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이상해보이지 않고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국가나 이념 혹은 자유 같은 ‘대의’를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이설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살기 위해 그만큼 처참해지고 살기 위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고 섬뜩하다. “게으르지도 않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늘 그 자리”(130쪽)여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294쪽)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질긴 놈이 살게 돼 있다”(14쪽)라는 신념을 갖게 되며 “내 밥통 넘겨보는 것들”(155쪽)을 경계하게 된다. <비밀들>에서 연락도 없이 집에 온 딸에게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애 밥부터 먹여.”(175쪽)다. 김이설 소설에서는 밥을 먹기 위해 피가 튀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밥을 먹으려고 피를 튀기는 서사는 군대 선임의 말처럼 현실과 유리된, 지나치게 과장된 스토리일 수도 있고 스토리에 개연성이나 완벽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 소대 안에서 소설 속 사건을 겪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소수의 사례를 소설로 썼기 때문에 그럴듯해 보이지 않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삶과 밀접한 장르고,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소설이 오히려 비현실적일 수 있고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소설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절망의 끝까지 가는 서사적 과장 때문에 이 소설은 오히려 진실성을 얻는다. 독자는 소설이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꽈리고추볶음과 계란장조림, 마른 김과 달래장, 샛노란 원목 의자와 같은 단어들로 소설은 핍진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읽는 이의 감정에 핏자국을 남긴다. 그럴듯해 보이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김이설 소설을 읽기 전과 후의 일상은 같을 수 없다. 절망적인 소설이 주는 핏자국은 오히려 “이 세계는 소설 속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매일 벌어진다는 것”(작가의 말, 343쪽)이다. 그러한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나와 선임 같이 ‘그럴 듯’해보이려거나 그럴 듯한 것만 보려는 것은 위선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소설은 피를 흘리게 하지만 이 피는 진짜가 아니고 단지 시뮬레이션이다. 밥을 먹기 위해 피를 튀기는 삶을 나는 살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누구든지 겪지 전에는 세월의 더께가 알려주는 교훈을 얻을 수 없었다.”(96쪽)는 소설 속 문장처럼 누구든지 실제로 흘러보지 못한 피에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다만 희미한 인식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가 밥 벌어먹기 힘든 사회, “가진 것 없으면 무릎 꿇어야 연명할 수 있는”(281쪽) 사회라는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