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저, 2014, 민음사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 제목을 최근 1년 동안 정말 많이 들었다. 뉴스나 칼럼에서 이 책 내용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특히나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더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아내도 이 책을 읽더니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한다. 짧아서 부담 없이 읽을만하단다. 내가 읽고 나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였다. 실제로 읽어보니 금방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읽는 내내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나는 83년생이고 남자다. 82년생인 김지영과 동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나는 내 또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온 적이 없다. 그리고 더 넘어 우리 엄마, 내 아내, 내 딸의 삶일 수도 있는 '여성의 삶'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자로서 참 편하게 살았던 것 같다. 남자이기에 혜택 받았던 것들을 그냥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나는 1남 1녀 중 막내다. 우리 누나와 나는 4년 차이가 나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가 한번 유산을 하셨단다. 처음에 누나가 태어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들이 아니라고 실망하셨단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까지 4년 동안 마음고생하셨다고 한다. 나는 아들이자 장손인 덕분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장손들은 세뱃돈도 더 많이 받고, 맛있는 음식들도 더 많이 먹을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런 대우를 받았다. 신기하면서도 불편한 경험이었다. 장손으로서 뭔가 더 잘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남아 선호 사상의 영향으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항상 남자애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에서는 보통 남녀 짝을 많이 하는데 남자애들이 많다 보니 남자애들끼리 앉는 애들이 2~3명 정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비롯한 남자애들은 남자들끼리 앉는 친구를 엄청 부러워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희 때는 남자들이 많아서 결혼하지 못하는 남자애들도 많을 거야."
결혼이 뭔지는 모르지만 남들 다 하는 결혼인데 내가 못하면 경쟁에서 지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애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20년 만에 남아 선호 사상은 여아 선호 사상으로 180도 변했다. 아들을 낳으면 키우기가 어렵고 결혼할 때 돈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들 둘 있는 엄마들이 오히려 딸 둘 있는 엄마들을 부러워한다. 참 재밌는 현상이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마음 깊이 반성한 부분은 집에서 육아하는 아내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해주지 못한 것이다. 아내는 나보다 수능 점수가 높았다. 중고등학교 때 독하게 공부한 여자다. 그런데 아내는 요즘 아이를 키우기 위해 휴직 중이다. 남자인 나는 휴직을 하지 않고, 여자인 아내는 휴직을 한다.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고 한 집안의 가장이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휴직하지 않고 교사로서 생활하며 성장을 하고 있고, 자아실현을 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아내도 직장 생활을 하며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육아로 인해 그렇지 않다. 육아는 여자가 하는 거라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히 여겼다. 생각해보면 내 생각의 8할은 진화심리학의 영향인 것 같다. 나는 진화심리학 책을 10권 정도 읽었고 그 책들을 읽으며 남자들은 사냥을 해서 고기를 가져와야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진화심리학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책이 있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마리 루티 저)라는 책이다. 그동안 내가 신봉했던 진화심리학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어서 읽어봐야겠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남자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을 괴롭힐 때,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괴롭히는 행위로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짝, 흑흑, 바꿔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어흐흑, 걔랑, 흑, 짝이 안되게, 흑흑, 해 주세요."
선생님은 김지영 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근데 지영아. 선생님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는데 지영이는 모르는 것 같네? 짝꿍이 지영이를 좋아해."
김지영 씨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뚝 멈췄다.
"걔 저 싫어해요. 그동안 괴롭힌 거 다 아신다면서요."
선생님은 웃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이 부분을 읽으며 뜨끔했다. 얼마 전 우리 반 여학생이 남학생들 5명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여학생이 우리 반에서 인기가 많고 그중 한 명의 남자애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위의 선생님처럼 이야기하였다. 그러다가 그 어머니에게 졸업 직전 전화가 왔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학생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다음 날 남학생들을 불러 엄중히 경고를 했다. 이렇듯 내가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에게 하는 장난을 남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된 건 내가 초등학교 때 그랬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으면 어떻게든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놀리고 때리고 튀고 그랬었다. 그래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여학생의 마음은 불편했을 거다. 남자인 나는 그 당시 내가 장난을 걸었던 여학생들의 마음에 공감을 한 적이 없었고, 교사가 돼서도 여학생들의 마음에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성하고 앞으로는 여학생들의 입장에서 많이 공감해야겠다는 반성을 하였다. 다음부터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여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남학생들에게 네가 하는 행동은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괴롭히는 거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그리고 만약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좋아하는 마음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남자들의 프레임으로 여자들을 바라보는 건 어리석은 행위다.
마지막으로는 여자의 생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남자이기에 생리의 번거로움과 생리통의 고통에 대해 경험한 적이 없다. 책 중간에 생리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가슴과 허리와 아랫배와 골반과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부어오른 듯 뻐근하고 당기고 쑤시고 뒤틀렸다."
온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이 아픈 고통을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겪는다니 참 안타깝다. 그걸 티 내지 않고 감당하며 살아가는 여자들은 참 대단하다. 여학생들이 생리통을 호소하며 보건실에 누워 있는 것, 여직원들이 생리 휴가를 쓰는 것에 대해 당연한 권리로 이해해 주어야 한다.
요즈음 남녀 간에 웹상에서 싸움이 많다. 남자들은 군대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고, 여자들은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이 세상은 남자들이 유리한 세상임은 맞는 것 같다. 단적으로 이 서평을 쓰는 설 명절에 나는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본가에서는 당연하고, 처가에서도 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여태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비판적 사고를 동원해 내 생각을 의심하고 반성을 한다. 나는 여자의 인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딸을 둘이나 키우는 입장에서 여자의 삶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내 딸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 차별받기를 원하는가? 성폭력의 두려움을 느끼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맘충 소리를 들으며 육아를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바뀔 건 바뀌어야 한다. 남자들이 성평등적 시각을 갖기 위해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교사들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 당장 남자는 1번, 여자는 51번인 시스템부터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