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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 Sung Aug 22. 2017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자유롭게 인터넷을 하며 대부분의 정보에 마음껏 접근할 수 있다. 밤 12시를 넘어 새벽에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 평소 생활을 할 때 국가 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돌아다닌다. 대통령을 뽑을 때 직접 투표장에 가서 뽑는다.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게 뭐 어때서?’라고 의문이 생기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아간지는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평소 살아갈 때 ‘산소’의 소중함을 잘 모르듯이 ‘민주주의’의 소중함도 잘 모른다. 


  나는 1980년 초반에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1990년대에는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는데 위에서 열거한 것들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는 선열들의 노력을 알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굳이 알려주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교과서에 4.19와 같은 글자를 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 봤던 백과사전에는 4.19 의거로 표현되어 있었다.  


  어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았다.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는 기사의 눈높이에서 5.18 혁명에 대해 그려내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의 눈에 비친 광주 민주화 항쟁의 참혹함은 대단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리라.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이 울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위기 상황에서 나의 가족을 버리고 대의(大義)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가?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나는 나의 소중한 가족을 버릴 수 있는가? 군대를 육군 장교(ROTC)로 나온 내 입장에서 나는 전쟁이 나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전사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결혼 전까지는 그랬다. 교사가 되고 결혼하기 전까지 2년 동안 6학년 아이들에게 사회를 가르칠 때 나는 당당히 말했다. ‘선생님은 전쟁이 나면 예비군으로 참전해서 열심히 싸워서 교과서에 실릴 거야.’라고.

  하지만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고 한 집안의 가장인 상황에서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나라보다 더 소중한 우리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택시기사(송강호)가 딸의 신발을 사고, 딸에게 전화해서 ‘아빠가 두고 온 손님이 있어…’라고 이야기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딸의 신발을 사 본 아빠라면 그 마음 다 알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사랑하는 딸을 두고 다시 위험한 광주로 다시 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며 대의를 위해 목숨을 잃어간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보며 그들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그렇게 목숨 바쳐 싸우겠노라고 다짐했던 대한민국 육군에서 대한민국의 무고한 시민들을 위해 총을 겨누고 실제로 사격을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대한민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쏠 수가 있는 것인가? 10년 전 군대에서 K-2로 실제 사격을 할 때 그 반대편에는 가상의 적군이 있었지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지 않았다. 영화 중간 군인들이 M-16으로 광주 시민들에게 총을 쏘던 장면에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영화가 공감이 되는 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구도로 갔다면 그다지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보통 사람들인 것처럼, 사실 광주 사태 때 출동한 군인들도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 소대장인 중사가 택시를 그냥 보내주는데 일말의 양심이 있는 군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악마’로 내모는 전두환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정말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다. 아직도 ‘회고록’을 써며 헛소리를 하는 그를 보면 ‘사회 정의’가 대한민국에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또한, 분명히 광주에서 시민들을 폭행하고, 사격을 한 군인들 중 상당수가 그냥 너무나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군대 요직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30년이 넘게 흘렀기에 은퇴했지만, 군인연금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것이나, 5.18의 주동자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라 본다. ‘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구냐?’를 밝혀야 ‘사회 정의’가 바로 선다. 


  재밌는 건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쓰는 이런 글들을 SNS에 올리는 것들에 상당히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 안보를 이용하는 집단들은 끊임없이 ‘안보’라는 프레임을 걸며 국민들을 ‘자기 검열’ 시킨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표현의 자유가 있거늘, 그것을 교묘히 방해한다. 그러고 보면 정말 민주주의는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은 노력해야 한다. 언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언론이 믿을만한 것인지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 끊임없이 정부가 하는 일에 ‘왜’를 던지며 의문을 제기하고. 맞는 방향이면 성실히 따라야 한다. 그렇기에 기득권들은 ‘비판적 사고’를 잘 하는 구성원들을 싫어한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교사인 나도 우리 학급에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는 학생이 있으면 귀찮을 때가 많다. 갑자기 학교에서 어떤 행사를 하라고 한다. 나는 거기서 ‘이거 왜 해야 해요?’라고 따지지 않는다. 서로 얼굴 붉히는 게 싫으니 그냥 시키는 데로 한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나에게 묻는다. ‘이거 왜 해야 돼요?’ 그러면 나의 대답이 군색해진다. ‘그냥 해. 인마’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지시와 억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교사 집단이 먼저 민주화되어야 한다. 제왕적인 교장의 리더십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교사들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되물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이 학교 행정 업무는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인가?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인가? 아니면 교장, 교감을 위해 하는 일인가?’


  그런 교사들에게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는 학생들이 성장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보통 사람이기에 내 마음속에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민주적인 교사와 억압적인 교사. 나는 앞으로 어떤 교사로 학생들 앞에 설 것인가? 기득권은 우매한 구성원을 좋아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희 거리들을 던져준다. 80년대 정부에서 스포츠, 영화 산업을 키운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기득권들이 계속 수능, 본고사와 같은 대학 입시에 매달리는 것도 여유 없는 국민들을 양산해 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영황에서 송강호가 돈에 쪼달리다 보니 사회적으로 큰 사건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당장의 내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다른 사람과 결쟁시키면, 큰 그림은 볼 수 없다. 사람은 여유가 있을 때 주변을 둘러보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우리 학급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며,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많이 주리라 다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집에 있는 내 자식들이 더 멋진 대한민국에서 민주시민으로 생활하기 바라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본 영화가 참 많은 생각을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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