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외
지난주에는 김동춘 선생님의 <대한민국은 왜?>를 읽었다. 300쪽도 안 되는 적은 분량이었고, 역사책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쓰인 책이었지만 일주일 안에 다 읽지 못했다. 진득하게 앉아서 집중력 있게 독서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 책은 원로 사회학자이자 성공회대 교수인 김동춘 선생님께서 쓰신 책이다. 반공, 기독교 이 두 가지가 ‘대한민국’의 기원이자, 정치와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공고한 운영 프로그램(OS)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 한일협정, 근래의 입시교육 풍경 등 한국사의 주요 사건을 나열하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밝힌다.
출판사가 정한 이 책의 핵심 카피는 ‘헬조선’이었다. 사실 원로학자 김동춘 교수의 입에서 이런 신조어가 나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출판사는 이 유행어(?)와 함께 이런 문장도 덧붙였다. “대한민국은 왜 이룩하려 했던 나라에서 떠나고 싶은 나라가 되었을까?” 모든 음절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이런 맥락이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구국(救國)’과 ‘입국(立國)’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제와 미제라는 거대한 ‘악’으로부터 주권을 지키려는 숭고한 투쟁사이자, 극빈국의 신분에서 벗어나 버젓한 국민으로 갱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조국근대화’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 ‘국가 건설’이라는 대과제 앞에서 물론 개인은 뒷전이었다. 그리고 국가가 개인을 능가하고 더 중요한 존재로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든 주역은 반공이다. 북한이라는 주적이 한반도 안에서 양립하는 한 ‘반공이 국시’인 보수 세력의 집권은 오래 이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왜>는 바로 이 국가라는 신을 핑계로, 압살 되고 소외된 개인―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민중, 백성, 시민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출되고 동원되었던 무수한 개인들을 돌아보고 그런 폭력의 기원을 좇은 책이다. 출판사에서 정한 카피 ‘헬조선’에는 피식민과 내전의 홍역을 겪으며 뒤틀릴 데로 뒤틀린 한국의 근현대사와 ‘군사주권 없는 주권국가’라는 모순덩어리 나라 대한민국의 민낯을 자조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괴상한 역사를 품은 이 시대의 사람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약자들의 삶을 ‘여전히 신분제가 작동하고 있는 지옥 같은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빗댄 것이다. 사실 나는 최근의 헬조선 열풍(?)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금수저’, ‘은수저’라는 빈부격차의 새로운 표현에 대해서도 딱히 마음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불우와 불행의 은유들은 이미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사회가 극단적인 양극화와 조선시대보다 더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계급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래 너무도 뻔하고 당연한 현상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이런 일상적인 불행이 갑자기 특정한 이슈가 되어 새로운 일인 양 회자하는 것이 나는 오히려 더 신경에 거슬리고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그런 ‘헬조선’ 대한민국의 역사적 근원을 추적하고 그 과정을 세심하게 담아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런 기대가 책을 구입하게 된 배경이 된 것은 사실이다. 또 책을 거의 다 읽어보니 애초의 그 기대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저자는 대한민국(남한) 단독정부 수립 자체가 이미 국가의 최고 이념을 반공으로 정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한계를 노정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맞는 말이다. 이승만 등 집권 세력은 ‘북괴’를 이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는 사악한 무리라고 규탄했지만, 정작 그들의 존립 기반이자 정체성의 근간은 한반도 이북에 북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처단해야 하지만 처단할 수는 없는 괴상한 공조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북한이 붕괴하는 순간, 즉 더 이상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수 없는 순간 이승만과 자유당, 나아가 작금 한국의 보수 세력들의 정치 입지는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기막힌 모순이 헬조선 대한민국을 만든 최초의 현대사적 사건이다. 친일잔재 미청산, 재벌기업 육성, 과거사 문제, 노동권 제한, 반공적 국가주의 등 대한민국이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악은 이 모순에서 잉태했다. 그리고 이런 악들은 다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 물질적 기반과 사회경제적 자원으로 치환되었으며, 입시지옥, 취업지옥, 오포세대, 세대 간 단절, 정치 무관심 등의 새로운 악의 모습으로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책은 근현대사의 거의 모든 주요 사건을 다루는데, 내가 전혀 몰랐던 사실도 있었고 애매하게 조금 알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다. 읽으며 대충 메모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친일파 윤치호의 자전 기록 <윤치호일기>, 심산 김창숙의 일생, 조봉암 무죄 선고, 안중근과 윤치호, 애국계몽운동, 일진회, 송건우, 한민당, 대구 10․1 항쟁, 대전협정, 조영암의 <북한일기>, ‘반공목사’ 한경직 목사, 통일교, 최인훈의 <광장>, 이항녕의 친일 고백.
이중 이항녕의 고백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적을 해방 후 스스로 고백한 지식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책에서 인용한 기사는 1980년 1월 26일 자 조선일보의 “나를 손가락질해다오, 역사의 전환점에 서서”라는 기사였다. 이항녕은 이 고백 덕분이었는지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의 고백기가 있다면 읽고 싶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제 분야의 다양한 문제들은 약 한 세기 이전의 한국이, 한국의 집권층이, 그리고 주변의 강대국이 택했던 선택들의 나비효과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기원이 있다. 지금 여기 헬조선에 거대한 ‘악의 강’이 흐르고 있다면 그 강의 상류 즉 원천에는 19세기 말 우리 선조들이 택하고 겪었던 잘못된 역사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기원을 추적해 현대의 모습과 이으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하지만 100년 전 한국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번뜩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왜 지금 이렇게 되었고, 지금의 이 문제는 과거의 어떤 문제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인지 개별적인 이해와 탐구의 과정은 온전히 독자의 몫일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의 홍보대로라면 사회과학서라고 해야 옳겠지만, 막상 읽어보니 말 그대로 한국 근현대사 역사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보수와 진보 세력, 국가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대결이었다고 매우 거칠게 정리했는데 그런 점에서 함께 읽어볼 책이 떠올랐다. 허동현과 박노자가 대담한 것을 엮은 책 두 권인데, 한 권은 <우리 역사 최전선>이고 또 한 권은 <길들이기와 편 가르기를 넘어>이다. 보수를 대변하는 학자와 진보를 주장하는 학자, 두 학자가 만나 서로의 입장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논한 책들이다. 건전한 논쟁의 가장 바람직한 예일 것이다. 논쟁은 사건의 진상을 좀 더 투명하고 선명하게 부각하여준다. 건전한 논쟁은 모순의 한국사를 탐구하는 가장 적절한 학문적 방법론일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이 현재의 두 학자가 진보와 보수라는 검을 휘두르며 맞선 책들이라면, <현실주의자를 위한 변명>과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은 역사 당시의 사건 앞에서 나름의 선택을 강요받았던 인물들의 작은 평전이다. 고종과 민비, 최창익, 이승만, 송진우, 여운형 등등 누군가들로부터는 지탄받고, 반대에서는 칭송받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인물들을 다뤘다. 사회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그 시대를 표류 혹은 장악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또 친미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한울에서 낸 <한국의 반미>가 퍽 도움이 될 것 같다. 걸프전 파병 반대 운동, 두 자매 촛불시위 등 약 30여 년의 한국 현대사에서 진행된 반미의 움직임과 그 기원을 정리한 책이다. 끝으로 역시 같은 출판사의 초신간인 <압축성장의 고고학>도 같이 읽어볼 만하다. 한국의 사회가 이전에 비해 실질적으로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그것이 역사적 진보인지 퇴보인지를 묻기 전에, 객관적인 사회조사 결과 자료를 통해 논증한다. 사회의 ‘질’이라는 것이 물량적인 지표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절반 정도는 차지하지 않을까? 작금의 역사 연구서, 혹은 교양서들이 저자의 해설과 정의 내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사실 위주의, 자료 위주의 책은 더없이 소중하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타자로 똑같이 필사하는 버릇이 있는데, 어제는 그간 필사가 밀린 책 중에서 정지우의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을 옮겨 적었다. 200쪽이 한참 안 되는 얇은 책이었지만, A4 용지 7장 정도 되는 분량이 나왔다. 나는 이 필사의 기록을 ‘好句錄’이라고 지었는데, 책을 다 읽고 이 호구록이 많이 나오는 책은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책이라는 나름의 독서의 기준을 세웠다. 정지우 작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작가의 책을 다 읽으면 호구록을 한참 써야 할 만큼 좋은 문장, 좋은 구절이 셀 수 없이 튀어나온다. 어제 적은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에서 몇 가지 고르면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동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청춘의 특권이다. 그리고 훗날,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기억도 바로 무언가를 ‘동경할 수 있었던’ 능력이다.-163쪽
현대인은 드디어 ‘완전한 원자’ 즉 자기 자신의 주인, 자기 영혼의 선장,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지만, 그 개인성을 어떻게 실현해야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막대한 자유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현실과 소비생활에 휩쓸려가는 소시민으로 전락한다.-78쪽
우연히 접한 이야기 하나, 어쩌다 알게 된 사람 한 명, 무심코 읽게 된 광고지면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이 외부를 향해 열려있을 때에만 가능하다.-143쪽
위의 문장들은 모두의 영혼을 울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가슴에 표창처럼 박힌 문장들이다. 나는 정지우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의 열렬한 애청자이기도 한데, 얼마 전에는 그의 팟캐스트 <뼈가 있는 책>의 새 코너 ‘신을 찾는 새벽’에서 흥미로운 책을 소개받기도 했다. 애런 버러러의 <신을 찾아서>가 그것인데, 정지우는 이 책이 자신의 팟캐스트 새 코너의 지향과 거의 일치하는 책이라고 한다. 한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지금은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신에 대한 물음과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작가는 ‘신을 찾는 새벽’이라는 코너에서 소위 ‘무신론자의 신 읽기’(내가 지은 말이다)를 시도한다.
무턱대고 종교를, 신의 존재를, 신도들의 비합리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신(혹은 신과 비슷한 무언가)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매우 이성적인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과학만을 그 탐구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팟캐스트 말미를 <신을 찾아서>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며 맺었다. “신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을 이 세상에 있을 수도 있다.” 아마 병렬한 이 두 문장의 간극은 엄청나게 광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남은 폭을 메워가는 것이 이 팟캐스트의, 정지우의 목적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작업을 좀 더 들어볼 요량이다.
내가 즐겨 듣는 또 다른 팟캐스트 <지대넓얕>에서는 이번에 특집으로 <사자의 서>를 다뤘다. 어디서 들어본 책 제목이었는데, 알고 보니 라마교에서 전승하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집이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으며 사자가 환생하여 극락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도움을 주는 이 기도집은 우리가 상상하는 죽음 이후의 모든 시각화한 이미지들이 당사자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시각 너머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 이것이 <사자의 서>를 반복적으로 읽으며 수행하는 라마승들의 세계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