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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일팔 Feb 12. 2016

텀블벅에 내 손모가지를 걸겠소

북펀딩의 가능성, 미래 출판의 가능성



요즘 날마다 즐겨 찾는 사이트가 있다. 


텀블벅 사이트다. 오늘은 무슨 새 프로젝트가 올라왔나, 어떤 참신한 기획이 시작됐나, 이런 호기심을 품고 접속한다. 텀블벅은 크라운드 펀딩 전용 사이트다. 기획자가 프로젝트를 올리면 예비 후원자들이 프로젝트의 재미와 가치, 리워드를 보고 후원금을 지불한다. 기획자가 애초에 목표한 후원액이 모두 모금되면 프로젝트는 '성공'이다. 목표 금액을 모으지 못했다면, 최초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다시 도전하면 된다.


텀블벅 = 크라운드 펀딩 플랫폼

펀딩의 조건 = 프로젝트의 재미, 취지 그리고 리워드(보상)


이 텀블벅에서 가장 많이 진행된 프로젝트 카테고리는 '출판'이다. 건당 금액은 크지 않지만, 2015년 총 197건의 출판 기획이 성공함으로써 텀블벅 전체 카테고리 중 가장 많은 진행 건수를 기록했다. 이 뜻은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시스템에 출판이라는 분야가 가장 적합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기성 출판이 아니고서는 수많은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자가 출판'과 '독립 출판'이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에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해 성과를 결산한 페이지. 텀블벅스럽다. 2015년 1년 동안 총 980건의 일이 벌어졌고 29억 여 원이 모였다.


독립 출판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현실이 되고 있다.


책이 만들어지는 공정은 무척 간단하다. 일단 기획을 한다. 기획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 쓸 것인가?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 

어떤 틀(제작 사양) 안에 그것을 담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누가 읽을 것이며 홍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충의 답을 단 뒤 책의 '구현'에 착수한다. 저자를 발굴해 원고를 의뢰하고 글이 모이면 편집을 한다. 그 과정에서 글이 대폭 수정되거나 추가되기도 한다. 최종 데이터가 정리되면 책에 쓰일 종이와 인쇄 도수를 결정해 인쇄소에 제작을 넘기고 홍보 업무를 시작한다. 책이 나올 때쯤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리고 계획한 홍보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이렇게 하면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온다.


사실 여기 적은 일들은 콜라 회사가 콜라를 만들거나 라면 회사가 라면을 만드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다. ‘책’이라고 하면 뭔가 복잡한 공정과 긴밀한 커뮤니케이션 끝에 탄생하는 고급한 재화라는 생각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밀한 배율로 콜라 원액을 섞어 캔 콜라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첨단화한 산업일 것이다. 


단지 출판이 어려운 점이 있다면 딱 하나다. 바로 돈이다. 개인이 출판이 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금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페널티가 있다. 콜라나 라면과 책이 다른 점은 바로 즉시적인 현금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책은 생산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다. 사비로 책을 만든다고 해서 바로 현금이 되지 않으니 만약 한 부도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인다면 그걸로 파산이다. 끝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는 자체적인 펀딩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뿐.


텀블벅의 '북펀딩'은 바로 이 점을 거의 완벽하게 해결해준다. 


텀블벅의 가장 큰 장점은 책을 제작하기 전에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참신한 기획을 올리면 익명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돈을 내놓는다. 많이 내놓을 필요도 없다. 출판산업 자체가 워낙 영세한 분야라서, 프로젝트의 가치와 재미를 잘 어필만 한다면 소액의 자본금 정도는 금방 모을 수 있다. 기백만원이면 충분하다. 최악의 경우, 초판 2000부 중 1900부를 고스란히 창고에 넣어두고 고사를 지낼 수도 있는 ‘작은 도박’과도 같은 출판이라는 사업을, 원금 떼일 염려 없는 위험 부담 제로의 아름다운 사업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외상이랄까? “돈을 먼저 주면 책을 만들어 드립니다."


이처럼 텀블벅은 개인 출판, 셀프 출판, 독립 출판 등등 돈 없고 규모가 작고 영세한 출판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줬다(물론 길만 열어줬다. 험지를 뚫고 걸어야 할 자들은 작고 힘없고 영세한 출판사 혹은 개인들이다). 돈이 모이면 그다음부터는 금방이다. 어차피 기획과 집필은 끝났으니 바로 제작에 넘기면 그만이다.


텀블벅의 또 다른 강점은 높은 공유성이다. 프로젝트가 게시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순간부터 실질적인 책의 홍보가 시작되는 셈이다. 책이 팔리기도 전에, 심지어 책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책의 탄생을 알릴 수 있는 강렬한 플랫폼이 신설되는 것이다. 독립 출판을 하려는 사람들이 이런 플랫폼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인터페이스도 훌륭하다. 프로젝트를 밀어주거나 관심을 표명한 후원자가 텀블벅 내 프로젝트 페이지를 손쉽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공유할 수 있다. 대부분 성공한 프로젝트들은 이렇게 후원자, 즉 소비자에 의해 자체적으로 여기저기 SNS에 공유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인 '자금 확보', 그리고 돈을 주고 진행하는 인위적인 광고가 아닌 소비자에 의한 '자율적이고 광역적인 홍보' 이 두 가지가 텀블벅(을 포함한 몇 가지 북펀딩 플랫폼)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현재 기성 출판이 겪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 중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크라우드 펀딩 혹은 소셜 펀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다. 내 돈이 어떤 맥락 안에서 어떤 취지로 사용되는가? 이 질문에 충실히 답할수록 모금액과 성공률은 높아진다. 


북펀딩은 일종의 선순환 구조다.

책의 제작 과정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타깃들에게 흘러들어가고 타깃들은 다시 주변 친구들에게 그 소식을 전파한다. 소비자들에도 ‘모금액이 다 모여야 자신의 후원이 성공을 하며 그에 따른 리워드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미션이 주워지는 셈이기 때문에 이런 홍보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전에 프로젝트가 충분히 (적어도 타깃들에게만이라도) 가치 있다고 느껴진다면 이런 의무감 없이도 후원자들은 백방으로 프로젝트의 유무를 널리 알리 것이다. 프로젝트의 기획자는 말 그대로 책의 기획과 제작에만 전념하면 된다.


이렇게 텀블벅은 작은 출판의 가장 어려운 점을 가장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해결해줬다. 이로써 자신의 상상을 책이라는 물질로 만들고자 하는 젊은 기획자들은, 그리고 작은 출판의 실험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은 출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에 온전히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텀블벅이라는 새로운 출판 제작-유통, 홍보-플랫폼이 출판의 새로운 미래를 열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중 하나라고 본다. 좋은 기획은 독자를 유인하고 유입된 독자는 다른 독자에게 기획의 소식을 전한다. 그렇게 자금이 모여 기획이 현실로 구현이 되고 그 역사가 모여 다시 새로운 기획이 탄생한다. 북펀딩은 일종의 선순환 구조다.  




북크로스가 자체 북펀딩을 시도하며 자사 블로그에 올린 글에 삽입된 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 출판사가 출간자금을 독자에게 '선불'로 요구한 것은 북크로스가 최초이지 않을까?




나는 기성 출판과 북펀딩의 협력을 기대한다.


물론 북펀딩이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 워딩은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이라는 출판의 미래를 담보해줄 만능 키라는 소리는 아니다. 게다가 펀딩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돈이라는 것이, 적으면 100만 원, 많아봤자 300만 원 정도인지라 기성 출판이 아무리 영세하다 할지라도 그 규모의 자산 갖고는 시중에 유통하는 품질의 단행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알라딘이나 교보에서 완성된 책의 실물을 꼼꼼하게 검토한 뒤 구입할 수 있음에도 굳이 돈부터 먼저 내놓으라고 웃으면서 협박하는 ‘북펀딩’ 시스템을 독자들이 마냥 좋아할 리도 없다.


그러나 나는 전면적인 교체는 어렵더라도 기성 출판 시스템 안에 녹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기성 출판 시스템 안에서 단행본을 출간하기 전에, 먼저 텀블벅이나 다음 스토리펀딩 등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독자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동일한 저자, 동일한 목차, 동일한 구성으로 프로젝트를 올리고 실제 목표 후원금이 모이면 책을 제작해 배포한다. 그렇게 소수의 독자가 모인 상태에서 다양한 피드백을 받은 뒤 기성 출판 시스템에서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을 개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전 독자 모니터링 및 조율 작업을 통해 작은 출판사들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북펀딩 과정에서 모집된 독자군은 매우 강력한 충성 독자, 그리고 무료 홍보 요원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출판사에 책에 대한 양질의 피드백을 줄뿐만 아니라 실제 실물 책을 통해 온오프라인에서 여기저기 홍보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출판사는 이렇게 모인 독자군을, 단순 홍보 목적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책을 평가하고 향후의 기획에 대해 의견을 게진하는 '협력 독자'로 대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장밋빛 미래만 전망한다고? 하지만 이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시도를 할 수 있겠는가. 실험과 그 결과에 따른 오차 수정의 작업이 지루하게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시도해봄직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양한 독립 출판을 비롯한 실험적인 셀프 출판이 북펀딩 플랫폼을 통해 세상에 나올 것이다. 젊은 작가, 혹은 그들의 공동체에서만 이 플랫폼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조만간 기성 출판도 이 시스템을 도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누가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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