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죽음에 대하여
요즘은 출판계를 둘러싸고 누가 ‘섹시’하고 ‘힙’하게
출판계의 망함을 이야기하는가 경쟁하는 구도가 펼쳐진 것 같다.
_출판, 노동, 목소리(49쪽)
책 ≠ 읽는 것
한국인들은 왜 킨들을 안 쓸까? (아예 안 쓰는 건 아니다. 거의 쓰지 않을 뿐이다) 정확한 이유는 한국의 이북 전문가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인은 종이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인이 무척 책을 사랑하고 지성 넘치는 민족처럼 들릴 것 같다. 문장을 조금 고쳐야겠다. 한국인은 종이책 ‘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킨들의 주목적은 ‘읽기’다. 우리가 전자책의 시대를 맞이해 가장 기대를 하고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설렜던 것은, 읽기라는 행위가 좀 더 용이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고 이동하면서 읽을 수 있으며 수만 권의 책(물론 진짜 그렇게 많이 넣고 다니진 않을 테지만)을 들고 다니며 원하는 책을 언제 어디선들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은 실제로 구현되었다. 멋진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종이책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겐 그 메리트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종이책 그 자체를, 그러니까 책을 소유하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까. 애초부터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니었다.
책이라는 목적어에 어울리는 서술어로 우리는 흔히 ‘읽다’를 꼽는다. 맞는 말이다. 책은 읽는 매체다. 하지만 내 미천한 독서력을 살펴보면 책을 순전히 읽는 매체로 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책을 머리말 정도만 읽고 덮기도 했고 심지어 충동구매로 잔뜩 사놓고 책장에 박아놓고 정신적 만족을 얻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작가의 마음에 드는 신간(‘마음에 든다’는 기준에 대해선 묻지 마시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글의 화두일 테니 좀 더 읽어보시라)을 만나면 ‘언젠간 읽겠지’ 하고 가방에 슥 넣고 나오기도 했다. 말하자면 끝도 없다. 내 집에는 2000권이 넘는 책이 있지만 그중 내가 읽은 책은 아마 10%도 안 될 것이다. 이따위 책을 샀다니! 신중하지 못한 내 태도를 두고 자책도 많이 했다. 나만 그럴까?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고 알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아마 읽지도 않고 (앞으로 영영 읽지 않을) 책이 책장에 잔뜩 꽂혀 있지는 않은지? 나는 그 수많은 책을 보며,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결국 선택을 받아 책장에 안착했으나 결국 펼쳐지지 못하고 먼지와 동거하며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의 쾌쾌한 몰골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책은 콘텐츠일까.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진리, 책은 지성의 결실이다, 라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어쩌면 우리 시대 책은 액세서리가 아닐까.
<쇼 미 더 머니>에서 아이돌이 우승하지 못한 이유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키겠다. <쇼 미 더 머니>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니 설명은 생략하겠다. 시즌을 거듭하며 스타 래퍼를 배출해내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방송 초기 아이돌(주로 그룹에서 랩을 담당하는 멤버)이 대거 출연해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실력과는 무관한 인기도가 우승에 영향일 미치는 것이 아니냐고 팬(즉 힙합 마니아)들로부터 공정성 문제를 지적 받았다. 실제로 위너의 멤버 송민호 군은 이런 팬들의 지적 덕분인지 최종 결승까지 올랐으나 결선에선 패배했다. 방송의 심사위원을 비롯한 연출진 모두 팬들의 지적을 의식한 것이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게 흥행에 더 바람직했으니까 벌어진 일이다. 가끔은 자본주의적인 것이 더 정의로울 수도 있는 법이다. 내부의 어떤 순환에 의해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자정작용이란, 실제로는 이렇게 당사자들의 외부에 있는 힘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 외부인 역시 힙합을 사랑하고 랩을 듣는 문화소비자란 측면에서 넓게 보아 당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음악 프로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한국의 문단 권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뭔 개소리냐고?
소설가가 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 <쇼 미 더 머니>의 경연 방식과 유사하다. 우선 소설을 쓴다. 소설가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창비로 갈 것인가, 문학동네로 갈 것인가, 문지로 갈 것인가. 한국의 문단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즉 콘텐츠의 생산자와 심사자와 유통자가 출판사를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 출판사가 바로 그 결합체다. 즉, 출판사가 자사의 소설가에게 소설 집필을 의뢰하면 소설가는 열심히 글을 쓴다. 그 글을 해당 출판사가 발행하는 문예지에 등재하고 역시 같은 출판사 소속의 다른 소설가들이 빛나는 서평을 써준다. 해당 소설은 “한국 문단의 쾌거”, “빛나는 금자탑”, “괴물 같은 신인” 따위 찬사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눈 먼 독자는 추천사 가득한 소설을 구입하고 그렇게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차트에 오른 소설은 계속해서 쇄를 찍는다.
이런 구조는 힙합 씬의 레이블 구조와 유사하다. 신곡이 나온다 → 동료들이 빨아준다 → 차트에 오른다 → 돈을 긁어모은다(and 유명해진다) → 동료의 신곡을 빨아준다. 출판사는 생산자이자 심사자이자 유통자이다. 모든 것이 한 곳을 통해 배출되고 유포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대형 출판사가 몇 곳 없다는 점이다.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즉 소설로 밥벌이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창비, 문동, 문지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이 세 군데 권력에 진입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소설을 쓰기는 하되 소설가는 아니다. 어느 젊은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소설가 1급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문예지에 자신의 소설을 올려 해당 문예지에 소속된, 혹은 해당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와 연을 맺고 있는 소설가들의 화력 지원을 받아 명실상부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것. 어쩌면 이 작업은, 즉 창작과는 하등 관계 업는 이 작업이야말로 한국에서 소설가가 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절차일지도 모른다.
문포자의 탄생
그리고 이렇게 양산된 소설들은 ‘한국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대중 앞에 전시된다. 문단의 희망! 한국 소설의 힘! 영향력 있는 여성 작가! 시대를 위로하는 글! 책의 뒷표지를 보면 그 수식이 현란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순진한 독자들은 그 말을 믿고 책을 구입한다. 혹은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하지만 이렇게 출판사의 미사여구만 믿고 읽기 시작한 소설들은 대부분 중도 포기한다. 독자를 책으로 이끌 이야기(서사)라는 길이 울퉁불퉁 제멋대로에 심지어 길이 끊기기도 한다. 작가의 사변과 궤변에 정신이 팔려 읽는 것이 쾌감이 아니라 고통으로 다가올 때쯤 우리는 스르륵 책 읽기를 중단하다. 책에서 좀 더 멀어진다. 물론 아닌 경우도 많다. 정말 좋은 소설은 언어로 치환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숭고하다. 좋은 책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지난 날, 그러니까 소위 ‘언어 영역’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째깍째깍 시계바늘 소리가 귓가에 웅웅 거리는 하얀 시험지를 생각해보자. 다음 중 화자의 시선과 가장 흡사한 세계관을 보이는 문장은? 다음 중 소설 주인공의 심정과 가장 일치하는 사자성어는? 다음 중 경숙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한국인 대다수는 문학을 이렇게 접한다. 우리에게 문학은 즐기고 느끼고 탐미할 대상이기 이전에, 마치 미적분처럼 이해하고 해제하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영역이 되었다. 이렇게 문포자가 탄생한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 출판사들이, 그 위대한 대문호들이 추천한 소설을 집어 든다. 하지만 역시 문학은 어렵다. 존나 어렵다. 책을 덮는다.
<쇼 미 더 머니>는 자정작용에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그것은 청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력이 안 되는, 지나치게 자의식에 도치된, 딜리버리(전달력)가 부족한 래퍼들은 도태되었다. 물론 심사위원들이 1차적으로 걸렀겠지만, 팬들, 즉 랩을 들을 줄 알고 힙합을 좀 아는 마니아층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감시하지 않았다면 <쇼 미 더 머니>는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을 것이다. 마치 어떤 나라의 문단처럼. <쇼 미 더 머니>는 실력이 없는 아이돌(물론 실력이 없진 않았지만 1등이 되기엔 부족했던)이 단순히 상업적 논리에 의해 1등이 되는 것을 문화소비자의 힘으로 막아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단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어떤 불의가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문학계간지를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말하자면, 현재 한국의 문단은, 문학계는 아무런 저항도 호응도 없는 무중력 상태에 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적분과 수리 ‘가’ 형을 혐오하듯, 수많은 한국인이 문학을 멸시한다.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이다. 그들끼리의 집단 교배(혹은 근친상간)에 의해 문단은 자정작용을 잃고 점점 고립되고 있다. 이 폐쇄적인 문화권력에 대해 대중은 관심을 잃은 지 오래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런 냉대는 책 전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과 그들이 쓴 책 사이의 괴리는 너무 커져버렸다.
위대한 책의 시대
나는 지금 문학의 이야기를 했지만, 과연 이것이 문학만의 이야기일까? 문포자를 양산한 문학의 높은 벽만큼이나마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벽 역시 높고 험난하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선 책이라는 친절한 안내자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책은, 이 시대의 책은 그 벽 위에 오밀조밀 짜인 철조망이 되어버렸다. 일단 타이틀만 확보해 발행하면 대중이 알아서 살 것이라 여겼던 돈에 눈이 먼 출판사 대표들과 날림으로 번역해 판권에만 지신의 이름을 올려두면 족히 여긴 안일한 번역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눈 감고 책을 편집한 편집자들의 죄가 크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자본주의를 무너뜨린 혁명을 낳았다고 떠들었지만, 정작 그 책을 제대로 읽은 독자는 몇이나 될까. 심지어 그들조차도 그 책을 읽긴 읽었을까? 조악한 번역과 상투적인 해설은 책을 대중으로부터 더 괴리시켰다. 반세기 이어진 선배들의 이 불철저함을,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지금의 출판계가 고스란히 떠안았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양산되고 있고 그것을 만든 이들은 대중에게 필독을 권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 그대로 책을 ‘읽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점점 줄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구입한다. 물론 위에서 말한 문단권력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의해 놀아나 그렇게 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외부 압력이 아니더라도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책, 사고 싶은 책에 대해선 아낌없이 돈을 투자한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것이 있다. 소위 독립출판물이라는 것을 만드는 창작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결과물을 파는 프리마켓 같은 것인데,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이 행사에 수천 명이 몰려든다. 이들은 단 3일간 열리는 이 행사에서 공간이 좁아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봉지를 주렁주렁 들고 돌아다니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기괴하고 요상한 종이뭉치를 구입해간다. 결제 방식은 물론 현금 결제. 나 역시 독립출판물을 애호하는 소비자로서 이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들은 그 유명한 대문호의 걸작 소설 따위보다 이름 모를 아마추어의 폐품 수집기를 더 애호한다. 이제 책은 단순히 읽기 위한 매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확인하는 재화, 즉 소비재에 가까워졌다. 혁명에 동의하고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키치한 젊은이들이 한때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머그잔을 들었던 것처럼. 차이가 있다면 정치가 탈색되었다는 것뿐.
독자 ≠ 읽는 사람
약 2년 전쯤, 소와다리라는 출판사에서 낸 초판 복간본 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윤동주의 시집 등 저작권이 만료된 국내 명작 시를 초판의 형태를 그대로 복원해 복간한 시리즈였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많은 사람이 책을 구입했다. 윤동주를 읽고 싶어서, 그의 시를 다시 읽기 위해서 산 사람들일 게다. 하지만 그중 절대 다수는, 그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혹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구매를 보여주고 인증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충분히 소비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고 예쁜 책은 먼지 쌓인 책장에 꽂혔다. 시장성만 따졌을 때 앞으로 이런 책은 무궁무진하게 등장할 것이다. 독자를 읽는 존재라고 규정하지 않을 때, 출판사의 선택의 폭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다른 무엇보다 편집자로서도 얼마나 편한가! 꼼꼼하게 교정을 볼 필요가 없을 텐데.
이제 우리는 안다. 책은 조금 재밌는 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나 음악, 뮤지컬이나 게임 따위와 우리는 질적으로 (혹은 의미적으로) 수준이 다르다고 자부했던 선배들은 저마다 책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 가령 부동산이나 땅, 주식 등을 쫓아 어딘가로 가버렸다. 황량한 파주와 빈곤한 마포에는 여전히 꿈을 좇는 출판인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책과 우리 시대의 책은 다르다.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독자를 독자라고 부르면 안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그토록 추앙했던 그들은 더 이상 읽는 사람(讀者)이 아니라 그저 소비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의식을 여전히 불편하고 마뜩찮다. 우리가 고작 대중문화의 소비재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 고생을 한단 말인가, 라는 자조가 벌써부터 저 멀리서 들린다(물론 이건 나의 자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토록 독자를 연호하고 강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독자라고 호명함으로써 이익을 얻게 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독자로 둔갑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은 숭고해지지만 일터의 조건과 환경은 그만큼 더 가혹해진다. 누가 득을 보는가? 독자가 보고 있으니 더 좋은 책을 만들라! 우리는 문화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이 구호가 익숙하다면 당신은 독자를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축에 서라.
결국 킨들은 한국에서 발을 붙이지 못했다. 종이책의 종말과 전자책의 세대교체를 예상(혹은 기대)했던 온라인서점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수많은 전자책 플랫폼 역시 의미 있는 점유율을 기록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독자를 너무 믿었다. 나는 이 글에서 읽기에 특화된 전자책 플랫폼이 종이책의 물성적 가치를 담아내지 못해 한국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소비할 주체들이 더 이상 읽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이상 책으로부터 어떤 지식이나 감상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변한 것은 그들이 무식하거나 교양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짜 무식하고 몰상식하고 심지어 비도덕적인 기성 출판인들 (혹은 출판권력)이 자초한 결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은 종이 수집가들이 되어 읽는 매체로서의 책이 아닌 문화소비재로서의 책을 찾아 돌아다닌다. 우리는 이제 이 종이 수집가들의 구미에 맞는 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죽음뿐이다. 하지만 이 죽음을 그 누구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책 말고도 소비할 것은 차고 넘치니까.
10년 동안 현장에서 경험한 결과 결코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를 들면 ‘식음업계의 미래’와 ‘음식의 미래’, ‘의류업계의 미래’와 ‘패션의 미래’가 다르듯 ‘출판업계의 미래’와 ‘책의 미래’는 확실히 말해서 어둡지만, 살아남는 방법은 많이 있으며, ‘책의 미래’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밝고 가능성의 바다가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_책의 역습(9쪽)
이 글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146a_ 글 잘쓰는 사람이 글 쓰는 직업을 갖기 힘든 이유" 에피소드를 듣고 작성했으며, 방송의 진행자 UMC와 게스트 손아람 작가의 의견을 참고했음.
원문: 네이버 블로그(http://blog.naver.com/sung870918/220927546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