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종주의 연구 센터 펠로우십을 마치며 上
지난 가을학기부터 시작한 보스턴 대학 반인종주의 연구 센터에서의 펠로우십이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한 학년도 동안 부끄럽지만 나름의 연구활동과 관련 인물 인터뷰, 그리고 센터장인 Ibram X. Kendi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펠로우분들로 부터 배우고 또 함께 토론하며 적은 리포트 또한 이제 발표되었습니다. Moving Toward Antibigotry: Collected Essays from the Center for Antiracist Research’s Antibigotry Convening 이라는 제목으로 총 36명의 펠로우가 16개의 전문분야에 관련한 편견과 차별에 대해 집필했습니다. 저는 아시아계 미국인 대상 인종주의를 주제로, 아시아계 미국인 학계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이시자 산증인이신 Paul Y. Watanabe 교수님과 함께 리포트를 작성했습니다.
저희 글은 출간물의 58페이지부터 73페이지에 실려있고, 저희 챕터만 추려진 버전 또한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박사학위 이상의 쟁쟁한 학자들, 그리고 활발히 사회 운동을 이끌고 있는 현직 변호사 위주로 꾸려진 이 펠로우십에 제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과분한 기회를 통해 기존의 제 생각을 보다 정교히 다듬을 수 있었고 저에 대해서, 시민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서는 제 리포트 내용보다는, 차마 담지 못했던 이야기와 연구를 진행하며 있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리포트 요약은 아래와 같이 짧게 갈음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부연설명과 함께 저희의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예시와 근거 또한 풍부하게 담겨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공공정책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것 같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센터의 입장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제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 그리고 이 리포트는 개인 단위의 부당함이 아닌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접근과 대책방안 개발이 그 목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편견은 이민정책, 외교정책, 군사정책 등으로부터 기인한다.
☛ 공공정책과 문화적 인식은 상호작용을 통해 아시아계 미국인 대상 인종주의에 있어 악순환을 이어간다. 이는 지방정부, 주정부, 연방정부 등 모든 단위의 정부에서 유효하다.
☛ 재산 소유권, 거주권, 입국권, 시민권 등에 대한 제재를 통해 의도적으로 2등 시민 또는 "외국인" 취급이 이어져 왔고, 이는 배척과 차별 그리고 때때로 아시아계 시민들을 적대시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여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특히, 아시안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는 대중문화와 미국의 전쟁을 통해 심화되었다.
☛ 우리 사회에는 묵시적인 인종적 위계가 있으며, 아시안들은 중간 즈음에 위치에 있기에 차별, 배척, 폭력 등 편견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해에 대해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아시안들 또한 인종주의적 사고를 내재화하고 일종의 "인종주의적 가스라이팅"을 당했기에 스스로도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모범 시민"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다. 이는, 남들보다 열심히 일해 자수성가하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며 결국에는 기득권이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데에 도구 내지는 근거로 사용된다.
☛ 하지만 미국 내 여러 인종 간의 관계는 일직선상에서 우위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내/외부자 지위 등을 포함해 최소 2차원 이상의 다면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 일직선상 우위 관계에 위치한다는 시각, 즉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종주의의 정의. 인종과 문화권 등 다양한 그룹들이 다른 모습과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등한 위치에 서있다는 시각이 반인종주의 (antiracism)이다.
☛ 권리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안전이나 번영과 같이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다만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이 다를 뿐이다. 약자를 불평등을 야기하는 제도적·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특정 그룹에게만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약자와 나아가 우리 공동체 모두의 이익으로 돌아온다.
최근 우연히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한 배우가 “사투리는 어떻게 고쳤냐”는 질문에 “사투리를 고친다기보다는 표준어를 익힌 거죠”라고 대답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도, 무슨 인터뷰 인지도 몰랐지만 보고 나서 너무나 가슴 벅차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도 흔히 접한 말이고 너무나도 짧은 문장이지만 그 뒤에는 여러 가지의 전제가 자리합니다. 사투리는 고쳐야 할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표준어에 비해 저급하고 뒤쳐지는 말투라는 생각, 또 이런 생각이 당연하다는 시선. 허핑턴포스트에서는 "차별주의적이고 서울 중심적인 질문"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인식은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나라와 지역별로 액센트 그리고 자주 쓰는 어휘나 관용어구가 천차만별이지만, 주로 본인 지역의 백인 주류사회의 언어습관만이 옳은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때문에, 최근 포용성과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공립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특정 문화권이나 인종 그룹이 액센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액센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 하나가 옳거나 틀린 것도 아니고,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다"라는 교훈을 전하고자 하는 움직임 또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어 구사 능력과 문법 능력을 곧 지적능력으로 도치하는 자세는 사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기인합니다.)
반인종주의 antiracism 또한 같은 논리로 인종주의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사실,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 그룹에 비해 우월하거나 뒤떨어진다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있습니다. 이는 비단 미국 내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며, 마치 모든 인종 그룹과 문화권 집단이 일직선상에서 우열에 따라 상하위대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적으로 팽배합니다. 사실은 이런 사고방식 그 자체가 인종주의 racism 라는 개념의 사전적이자 학문적인 정의입니다.
반인종주의는 이를 상쇄하고자 하는 접근으로, 단순히 인종주의를 받아들이거나 행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종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아가, 위에 언급한 대로 다른 인종 그룹들 사이 우열의 순위가 있다는 오해를 해소하고 우리 모두는 동등한 위치에 있으나 다른 상황에 처한 그룹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을 바로잡는 접근입니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합법적으로 자행되었던 공교육 기관 내 인종분리 racial segregation 정책을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1896년 대법원이 Plessy v. Ferguson에 대한 판결문을 통해 "분리되었더라도 평등하다 (separate but equal)"이라고 결정을 내려, 1954년 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로 "분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등치 못하다"라고 번복을 할 때까지 미국 내 거의 모든 공공시설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법이라는 이름 아래 합법적으로 자행된 차별이 만행했고, 이는 어린아이들이 진학할 수 있는 학교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종별로 분리하는 것은 인종주의적인 개념 중에서도 분리주의 segregationalism 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즉, 특정 인종 그룹이 본질적으로 다른 그룹에 비해 뒤떨어지기 때문에 서로 따로 지내야 한다는 인식입니다. 인종주의 내 또 다른 개념으로는 동화주의 assmiliationism이 있는데, 이는 사회 내 지배적인 그룹의 문화 또는 행동양식에 맞추어 소수 그룹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위에 언급한 영어 액센트나 한국어 사투리에 관해, 환경의 변화 또는 노력을 통해 백인의 영어 발음을 갖추고 표준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이 동화주의적인 접근의 단편적 예시입니다. 또한, 흑인 학생이 백인 학생에 비해 뒤쳐지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등교해야 한다는 입장은 분리주의, 흑인 학생은 백인학교에 등교함으로써 노력을 통해 백인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은 동화주의의 산물입니다. 이런 예시는 물론 실제로 한때 미국에서 널리 실행된 정책입니다.
이런 차이를 바로잡아야 할 문제로 보고 그 이유를 본성 nature에 있다고 보는 것이 분리주의, 환경 nurture에 있다고 보는 것이 동화주의라고 단순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반인종주의는 이에 반해, 본성이나 환경 모두 이유가 아니며 이런 차이점을 문제로 보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영미권에 정착한 아시아계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영어 액센트에 대한 강박관념과 부끄러움이 만연합니다. 소위 "액센트 없이" 영어를 구사하는 이민가정 출신 2세 또는 3세의 경우,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모국어 액센트가 섞인 영어 발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당연시되지요. 실제로 1980년대 초부터 90년대 말 사이에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한인 이민가정 출신 자녀들에게는 백인 액센트를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미명 하에 의도적으로 한인 또는 아시아계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한국어도 배울 필요 없다는 양육방식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에 유년기를 보낸 미주 한인들이 가정에서 한국어를 따로 배운 적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친구들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카카오톡 등 한국의 서비스를 다수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뚜렷한 세대차이와 문화와 인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종주의적 또 차별주의적 발상은 비단 하나의 나라, 문화권, 인종, 또는 언어권에만 국한되어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 펠로우십에서 저를 비롯한 몇 팀은 인종주의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지만, 넓은 목표는 인종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편견에 대해 다루는 것이 저희 펠로우십에서 공통으로 지향한 목표였습니다. 센터의 이름 또한 반인종주의 연구 센터로 명명되었으나, 발족한 지 2년 즈음이 되는 현재 포괄적인 편견과 차별을 다루고자 센터의 첫 펠로우십의 주제를 이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Kendi 교수님과 그의 반인종주의 프레임워크에 대해서는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의 지난주 방영분을 참고하시면 빠르고 손쉽게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근 임기를 시작한 Ketanji Brown 대법관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언급된 그의 책, 그리고 그 언급된 배경에 대해서 짤막하게 다루는 인터뷰입니다.
"인종 차별"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접하곤 합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 이후 서양 사회에서 아시아계 대상 폭력사건이 급증하며 더욱이 자주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종종 인종주의적 언행을 차별행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저는 "증오 범죄"라는 용어의 사용도 지양합니다. 왜 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하지만 둘은 분명 다르고 독립적인 개념입니다.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위에서 "다른 인종 그룹들 사이 우열의 순위가 있다는 오해를 해소하고 우리 모두는 동등한 위치에 있으나 다른 상황에 처한 그룹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이런 인식이 발현되는 방식은 다양한데, 특정 집단에 대한 일반화 (generalization 또는 stereotyping)부터 폭력, 배척, 배제 등 대개는 대상의 정체성을 단면화하며 박해하는 언어와 행동이 포함됩니다.
"차별" 또한 일상에서 흔히 오용되는 단어인데,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차등을 두는 구별'이라 정의합니다. (2008년 발간된 <차별판단지침> 및 2022년 5월 방영 MBC 다큐프라임 <차별금지법> 참고) 나아가, "차별 영역은 광범위하고 다양하고 복잡하여 법률 및 인권 규범의 개입의 경계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차별행위의 사유는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 등"으로 꼽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지난 1964년에 제정된 민권법 Civil Rights Act of 1964에 명시된 내용과도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법리적인 정의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차별행위를 개인적인 도발이나 자극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힘의 불균형입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 행위의 주체와 대상 사이 힘의 불균형이 어느 쪽에 치우쳐져 있는지 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차등을 두는 구별"이라는 정의에 나오는 차등을 두는 행위만 보더라도 곧 그럴 권한이나 힘이 있는 주체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차별행위는 대부분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대상으로, 교실의 선생님이 학생을 대상으로,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을 대상으로, 정부기관이 시민을 대상으로 등 직간접적인 위력의 사용을 통해 발생합니다.
피해자가 이런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는 경우, 차별은 곧 폭력이 됩니다. 위에 꼽힌 차별행위의 사유 또한 개인이 단순하게 선택하는 속성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회통념에 의해 배속되었거나, 종교나 사상 같은 선택 이상의 신념이거나, 신체적 또는 태생적으로 기인한 속성이거나, 또는 위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주어진 상황인 경우입니다. 이러한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사회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소수자 minority는 단순히 그 집단의 규모가 작아서 소수자가 아니라, 숫자에 상관없이 사회적인 약자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언론을 통해 때때로 전해지는 "부자에게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는 주장, 또는 대통령 등 "고위공직자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역차별을 당한다"는 호소는 논리적으로 비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피해자가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언행이 차별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명시적이고 의도적"이지 않다고 차별이 아니라는 의미 또한 아닙니다. 2022년 2월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홍성수 교수는 여성이 차별에 노출되는 것은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체계, 구조, 문화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많은 소수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혐오와 차별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깊은 연구를 하신 홍성수 교수님을 향한 팬심을 저는 리포트에 유일한 비-영어 레퍼런스로 인용하는 것으로 소심하게 표현했습니다.)
저의 리포트 그리고 펠로우십뿐만 아니라 보스턴 대학 인종주의 연구 센터와 같이 관련 문제를 다루는 학자, 정책 수립자, 시민활동가들은 증오, 편견, 차별, 폭력 등에 대한 접근에 있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교류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공공정책 등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소수자를 만들어지고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지속되는 요인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능력에 비해 욕심이 한참 앞서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에 두 편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요, 다음 편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려 합니다:
인종주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 또 가해자인 우리: "우리"라는 말에 우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AAPI라는 구분과 용어에 대한 단상
결국에는 교차성이다: intersectionality와 critical race theory
공정과 평등이란, 그리고 내가 꿈꾸는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