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체르마트/ 스위스
두 달간의 일정 중 가장 혹독(?)했던 코스가 체르마트다.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상황은 고생 그 자체였다.
체르마트에 마음이 당겼던 건 이글루 호텔때문이었다. 하얀 눈 위의 이글루,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감기는 악화일로다. 그럼에도 나는 비를 맞으며 쏘다니는 중이다. 비의 자기장에 갇혀 버렸나 보다.
체르마트의 이글루 호텔에서 안내 메일이 왔다. 이글루 안에는 짐 보관할 공간이 없다는 것과 기온이 낮으므로 스키복 차림을 할 것. 권고사항 같지만 이는 명령이다. 취리히를 떠나기 전 나는 간단한 소지품을 작은 배낭에 챙기고 아예 스키복 차림을 한다.
험준한 산악이라서인지 체르마트는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취리히에서 스위스 국영 열차 SBB를 타고 비수프(Visp) 역까지(1시간 반 정도) 간 후, 비수프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1시간을 더 달려야 체르마트다. 비수프에서 출발한 열차는 내 이미지 속의 스위스, 그 눈나라로 빠르게 진입한다. 열차 2층칸에 자리 잡은 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비어 있는 긴 의자에 발을 뻗고 앉았다가(자는 사람도 있다) 하얗게 펼쳐지는 설경에 벌떡 일어나 사진을 찍어댄다. 이런 풍광을 비경이라 하나. 이 눈부심을 표현할 말이 없다.
체르마트는 자동차가 없는 산속 청정마을이다. 한겨울의 체르마트다, 말해 무엇하랴. 과장 없이, 호흡을 할 때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기침에 콧물까지 처치해야 하는 나로선 숨쉬기가 고역이지만 이 쨍한 상쾌함 앞에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가슴을 천천히 열고 마스크를 낀 채 길고 깊은숨을 들이켠다. 우와~~ 스위스구나!
눈 덮인 산속에 들어앉은 나무 건물들은 하나같이 정감 있다. 한 겨울인데도 건물 창틀에는 꽃이 졸졸 걸려 있다. 배낭 멘 사람들, 여행 가방 끄는 사람들, 군밤 파는 수레, 커피를 나르는 투박한 몸매의 아주머니 등이 모두 동화 속 주인공이다.
열차에서 스낵으로 아침을 때운 나는 속을 채우기 위해 레스토랑부터 찾는다. 피자, 맥주, 아이스크림. 먹음직스러운 광고 포스터를 보고 눈이 가는 대로 주문한 음식이다. 허름해 보인 가게인데 피자도 맥주도 훌륭하다. 피자판만큼 커다란 접시에 나온 아이스크림도 기대 이상이다. 속을 채운 나는 생수 한 병까지 계산한 후 밖으로 나온다.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산악열차 고르너그라트를 타러 가자. 고르너그라트는 이글루 호텔을 지나 마터호른 정상까지 오른다. 내가 내릴 곳은 리펠버그 역. 이곳에서 이글루 호텔 안내인을 만나기로 되어 있다.
열차 안 사람들은 모두가 스키복 차림이다. 스키어들 사이에, 나와 대만인 관광객 몇 명이 휴대전화를 들고 앉아 있다. 물을 마시려는데 생수병 바닥이 재밌게 생겼다. 방금 피자가게에서 사들고 나온 생수병 바닥에 마터호른 모형이 들어 있는 것. 내가 생수병을 대만 사람들에게 건네자 그들은 가방에서 도블레스 초콜릿을 꺼낸다. 도블레스 포장에는 마터호른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역에서 내려 도블레스 초콜릿을 든 채 마터호른 정상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깔깔댄다. 행복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마음껏 웃는다.
고르너 그라트 반, 나와 마주 앉은 좌석에 꽁지머리 백인이 앉아 있다. 흠, 말을 걸어볼까?, 하는데 그가 먼저 동양인인 내게 말을 건다. 티모(Timo)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휴대전화를 뒤적이더니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출연 배우들과의 사진이다. 주인공이 행글라이더 타는 장면이 실은 자신이라고. 우리는 반갑게 악수하고 사진도 함께 찍는다. 운동광인 그는 오늘은 스키를 즐기기 위해 마터호른 정상까지 가는 중이란다.
리펠버그 역에 운동화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모두 스키를 매거나 스노보드, 썰매를 끌고 있다. 주변은 온통 흰 눈이 두껍게 깔린 대지와 위용 넘치는 산의 파노라마다. 오염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가볍고 싱싱한 바람이 넋 나간 나를 덮쳐 볼을 얼얼하게 한다. 잠시 후 산에 단련된 듯 건강미 넘치는 이글루 안내인이 두툼한 장화를 신고 나타난다. 그녀는 검정 머리칼을 뒤로 날리며 마른땅을 걷듯 앞서 가고 나는 그 뒤를 비틀비틀 미끄러지며 따라 걷는다. 그렇게 10여 분을 걸어 이글루 호텔에 도착한다.
웰컴 드링크로 나온 따듯한 뱅쇼가 혈관 깊숙이 전달되며 몸을 이완시키지만 마터호른의 냉기를 감당하기엔 무리다. 흘러내린 코가 인중에 얼어붙는 느낌이다. 미리 주문해 둔 퐁듀와 치즈가 저녁 식탁에 차려진다. 얼음 테이블이다! 저녁식사를 한 후 이글루 구경에 나선다. 이글루 내부는 얼음과 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여름이면 녹아 없어질 것을 알면서 조각에 이리 정성을 쏟다니, 조각가의 진심과 순수에 감탄한다. 아니 어쩌면 그 피할 수 없는 사라짐에 진하게 감동한다. 문제는 온기라고는 없는 실내다. 침대로 마련된 매트리스 위에는 동물 가죽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침낭이 놓여 있다. 작은 온열 매트를 준비해 갔으나 콘센트라고는 벽면 어디에도 없다. 냉골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초저녁부터 나는 밤을 보낼 일로 걱정이 태산이다.
이글루 안에는 화장실도 없다. 일을 보기 위해서는 가로등 하나 없는 눈길을 걸어갔다 와야 하는데 눈길에 나갔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이런…, 자다가도 두어 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나로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화장실 달린 방은 없을까요? 내 질문에 길을 안내했던 직원이 가격을 업그레이드하면 화장실과 자쿠지가 마련된 특실로 옮길 수 있단다. 나는 두 배나 더 주고 가차 없이 방을 옮긴다. 옮기고 보니 창문으로 마터호른이 마주 보이는 전망까지 ‘끝내주는’ 방이다.
화장실과 자쿠지를 확인한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지만 냉기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낭 안으로 들어간다. 벗어 둔 신과 모자까지 침낭 안에 모조리 집어넣는다. 내 생애 가장 긴 밤이 지난다.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오전 6시까지 몸을 웅크리고 냉기에 떨던 나는 자쿠지에 몸을 담고서야 까무룩 잠이 든다. 아침은 산을 내려가 온기 훈훈한 산장에서 뷔페식을 대접받는다. 주변을 암만 두리번거려도 나만큼 늙은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쉽지 않은, 참으로 격한 경험이었다.
산속으로 질주하는 고 너 그라트 반
고 너 그라트 반을 타고 오르는 길에 아래로 보이는 소박한 산골 마을
산악기차 고 너 그라트 반 매표소(왼쪽)와 체르마트 마을(오른쪽). 목조건물 너머로 마터호른 봉우리가 보인다.
열차 안에서 만난 티모. 사랑의 불시착의 스턴트 맨으로 행글라이더 타는 장면에 출연했다(좌). 마터호른이 새겨진 체르마트의 생수 병(우)
리펠버그 역에 도착한 고 너 그라트 반
아침 햇살에 물드는 마터호른
광고에 삽입된 마터호른과 스키 리프트. 이른 아침부터 스키어들이 산을 수놓는다.
이글루 호텔 내부1. 얼음 속 장미꽃 장식, 첫 마음은 아름다웠으나 잠시 후 짠 하니 아릿함을 주던 장식이다. 얼음 속에 갇힌 눈부신 꽃은 아이러니다.
이글루 호텔 내부 2
멀리서 바라본 이글루. 중앙 돔은 사무실이고 오른쪽과 왼쪽에 보이는 네 개의 입구가 게스트 숙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