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 / 독일
기어이 병이 났다. 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흔적을 따라온 것이므로 우선 괴테 하우스를 방문한다. 유럽의 비는 서울의 눈보다 차다. 세찬 바람에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빗발 사이를 우산도 없이 걷기를 거의 한 주간이나 했다.
무슨 깡으로 비를 맞고 다녔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걷고 싶었고, 흠뻑 젖는 게 싫지 않았다. 낯선 곳이므로 가능했던 머 그런 일쯤으로 치자.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서울에서라면 비를 맞고 걷는 내가 몹시 초라해 보였으리라.
프랑크푸르트 기차역 가까운 곳에 호텔을 나흘이나 예약해 놓고 나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 헤르만헤세의 고향 칼프도 다녀와야 하는데 몸이 여의치 않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나의 사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괜스레 괴테를 좋아한다. 프랑크푸르트 여행은 괴테 생가와 괴테 가도를 달려보는 것인데 그것도 불발. 하필 이때 병이 날 게 뭐람.
괴테하우스는 그와 가족의 부유한 삶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사용했던 가구들은 지금 내놓아도 어느 부잣집 가구 못지않게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2층, 괴테가 태어난 방에는 그의 어린 시절 성장기 모습을 차곡차곡 담은 유화 그림들이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다. 부족함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의 성장기와 그의 집, 정원을 거닐면서 생각에 빠진다.
괴테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서간체로 쓰인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은 일본식 번역이 그대로 한국에 전해진 결과다. 원제목을 읽으면 주인공 베르테르의 원어 발음은 베르터에 가깝고, Leiden의 번역은 슬픔보다는 고뇌, 고통 등이 적합하다.) 괴테의 두 번째 작품으로 그에게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안긴 작품이다. 이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베르터 효과’라는 말이 회자할 정도로 거리에는 베르터와 닮은 복장이 넘쳐 나고 모방 자살이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증가한다. (그로 인해 자살 소설이라는 오명을 쓴다)
진한 감성의 소유자 베르터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자화상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낭만적 비극 한 편을 탄생시킨 것이다.
괴테는 1772년 5월, 법률 실무 견습 차 베츨라어의 고등법원에서 일한다. 이때 알베르트의 원형이 된 요한 케스트너와 그의 약혼녀 샤를로테 부프, 유부녀인 헤르트 부인을 사랑하는 카를 예루잘렘을 만난다. 샤를로테 부프를 향한 사랑으로 고뇌하던 괴테는 그해 9월 베츨라어를 떠나 귀향하는데, 도중에 막시 밀리아네를 알게 된다. 괴테 귀향 후 10월 말, 베츨라어에서는 예루잘렘이 자살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소설적 고리로 연결한 것이 <젊은 베르터의 고뇌>이다.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도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하고, 우리로서 흥미로운 사실은 롯데 그룹의 명칭 ‘롯데’가 ‘(샤를) 로테’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여고 때였는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필독서였고,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우리는 너나없이 베르테르의 우울에 매료되었었다.
괴테하우스에 들른 것으로 괴테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오랜 기다림 끝에 연인을 만난 듯, 나는 괴테의 가족사진 앞을 열병식 하듯 걸으며 그와 조우하는 기쁨에 빠진다. 감기로 프랑크푸르트 일정을 망쳐 버렸지만 매력적인 남자 괴테를 만났으니 절반의 목적은 이룬 셈이다.
(*괴테의 생애는 위키백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옮겨 적습니다. )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괴테 하우스 입구.
괴테 하우스 정원이다.
괴테 하우스 내부.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책방이 눈에 띈다.
괴테의 성장기가 그려진 유화 그림들이 벽을 빙 돌며 걸려 있다. 화가를 불러 때맞춰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은 부잣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