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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Nov 07. 2023

시간의 뒤안, 군산

기억이란 시간의 지평 위에 새겨진다.


 오후 늦게 도착한 군산에서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숙소를 잡은 후 나는 어슬렁 경암동 철길마을로 길을 잡는다. 1944년 일제 강점기 때 곡창지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건설된 철길이다. 불행한 역사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불량식품가게」라고 쓴 간판을 따라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선다. 가게에 진열된 과자봉지, 장난감 등을 눈으로 훑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뒷문이 철길에 닿는다. 돌계단 두세 개를 내려서자 시간이 과거로 회귀한 듯 풍경이 급격하게 바뀐다. 나는 짧은 탄성을 뱉는다. 


 좁은 철길과 침목이 역사를 등진 채 시처럼 놓여 있는 위로 총천연색 사람들이 알록달록 무늬를 만든다. 철로 옆으로는 철길에 바짝 붙은 채로 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한쪽은 2층으로 한쪽은 단층으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나는 400미터 남짓한 길을 이 끝에서 저 끝자락까지 걷는다. 2008년까지는 기차가 하루 두 차례 운행되었다니 연인들과 사진가들에게 크게 인기를 누렸을 성싶다. 황정민 한혜진이 아이스크림 먹으며 걷는 장면(2014년 개봉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 중에서)이 무채색 철길 위에 오버랩된다. 나는 몽환에 빠진다.     


 요즘은 보기도 쉽지 않은 연탄 화로 위에 국자를 올리고 주인이 부어주는 설탕을 나무젓가락으로 저어가며 녹인다. 다 녹은 설탕 위에 소다를 찍어 넣으면 노랗게 달고나가 부풀어 오른다.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저은 후에 양철판 위에 달고나를 붓고 모형을 골라 올린 후 손잡이가 달린 누름개를 대고 눌러주면, 그 옛날 ‘뽑기’가 완성이다. 모형을 잘 떼어내면 한 개를 더 주는 집도 있다. 주인이나 손님이나 재미로 하는 일이다. 


 뽑기를 한 후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불량식품을 파는 가게를 지나쳐 교복점, 옛날 문구점과 만화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들 상점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수제 공예품 가게에서는 도자기 접시 두 개를 고른다. 풍선을 터뜨리면 봉제 인형을 주는 다트놀이, 다트 스무 개 중에서 열두 개를 맞추고 하늘색이 고운 인형 하나를 받아 든다. 길이 끝나는 즈음에 말타기 조형물이 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즐기던 놀이다. 숫기라고는 없던 나는 말타기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람들 틈에 줄을 선다. 차례가 오자 나는 부끄러움도 없이 냉큼, 소년이 내어 준 말잔등에 올라앉아 사진 한 장을 남긴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21세기 아이가 철길 가운데로 뛰어가며 포즈를 취한다. 젊은 엄마가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어 아이에게 맞춘다. 어린애 등 뒤로 유년의 내가 스치운다.

 캐리커처 가게 앞이다. 그의 경력을 새긴 인쇄지가 유리문 밖에서 보이도록 붙어 있다. 나는 다른 사람 얼굴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15분. 그는 감쪽같이 내 얼굴을 그려낸다. 만화처럼 귀엽게.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커플이 교복을 입고 철길 위에서 요리조리 자세를 잡는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발길을 멈추고 구경꾼이 된다. 쑥스러울 법도 하겠건만 그들은 오히려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연예인처 사진 찍기에 몰두하고, 사진사는 반사판을 우산처럼 든 채 주인공을 향해 셔터를 터뜨린다. 행인은 일시에 관객이 된다. 흑백 브라운관 속의 한 장면인 듯, 광경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철길이 끝나는 반대편 끝에 또 다른 조형물이 있다. 기차를 기다리는 아이들, 계집아이 조형과 나란히 서서 나는 또 한 번 나의 유년을 채집한다.     


 경암동을 벗어난 나는 월명동 히로쓰 가옥을 찾는다. 고리대금과 쌀장사로 돈을 번 일본군 히로쓰의 집이었다는데, 꽤 부유했던 모양이다. 씁쓸한 것은 이 집 이름이다. 그저 일본군속의 집이라 해도 좋으련만 굳이 그 이름을 기억하게끔 히로쓰 가옥이라 부른단 말인가. 이순신 장군도 아니고 세종대왕도 아닌, 수탈자의 이름을 이 땅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 영 마뜩지 않다. 마당에는 연못이 달린 잘 가꾸어진 정원뿐 아니라 우물과 쌀 저장고, 뒷마당에 수영장까지 있다. 말단 군인의 집이 이리 호화스러웠으니 수탈을 감내했을 선대 삶의 지경이 어떠했을지 짐작마저 쉽지 않다. 이 적산가옥을 구경하고 뒷문으로 나오면 말랭이 마을 언덕길과 조우한다. 낮은 지붕들을 지나 꽃이 핀 골목을 따라 오른다. 중턱에 막걸리 양조장이 있으니 탁주 한 사발 걸치고 걸어도 좋겠다. 언덕 꼭대기, 마을 끝에는 1970년대 거리를 재현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제법 볼 만하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데크로 나오면 군산의 현재가 발아래 펼쳐진다. 기억이란 시간의 지평 위에 새겨진다. 시간을 안은 군산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후인에게 군산의 기억을 들려줄 것이다.     


경산동 철길마을. 낡은 가게에서 내뿜는 화사한 조명이 무거운 철로에 경쾌함을 준다.      



말랭이(산비탈:전라도 방언) 마을 꼭대기에 오르면 1970년대의 거리를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다. 중년의 그들이 살아온 골목길이 그곳에 있다. 지금은 우리 일상에서 사라져 버린 오래된 물건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사람들. ‘생각보다 예쁘게, 상처받지 않게 그려드려요’라는 광고 문구가 사람을 끌어들인다. 



철길마을엔 주차가 마땅치 않아 맞은편 이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건물 앞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마터면 놓칠 뻔한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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