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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Aug 12. 2024

졸혼에 대하여

엄앵란 신성일과 홍상수 김민희

 

졸혼, 이보다 우스운 어휘가 없다. 우선 졸혼을 이해해 보자. 반쯤 이혼한 상태. 혼인이 유지되는 서로 눈감은 상태. 상대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된 상태. 결혼과 이혼의 타협지점? 나의 해석이 삐딱한가. 그렇지 않다. 졸혼은 아무리 곱게 봐도 서로에 대한 묵시적 배반이다. 나는 졸혼을 병리적 어휘로 본다. 졸혼은 일본에서 처음 생겨나 빠르게 현해탄을 건너 우리 안방에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졸혼이 무엇이냐 묻는 사람도 없다.

     

결혼은 두 사람의 동거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이유로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부부가 위험하게 보이기도 한다. 졸혼은 동거하지 않은 체 ‘서류’를 붙들고 있는 이상한 결혼이다. 지난 세기만 해도 결혼은 개인사라기보다 가족사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애결혼이 대세다. 개인의 행복과 직결된, 지극히 개인사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상한 혼인을 유지할 이유가 뭔가.

    

결혼을 문명화시킨 세기의 사건으로 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을 떠올린다. 이들의 계약 결혼은 보수적인 당시 사회에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각설하고 계약 내용을 보자. 첫째,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용한다. 둘째,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이목의 중심은 첫 번째 항목이다. 이런 계약을 지금 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쉬운 조항이 아닐진대 하물며 100여 년 전 일이라니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이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 계약은 사랑의 가변성을 인정한다. 서로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과의 사랑도 인정한다는 모순의 인정. 이 결혼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결혼은 타협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는다.    

  

 졸혼은 사랑에 무덤덤해진 두 사람이 복잡한 절차 없이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버리기로 하는 것이다. 쓸쓸할 따름이다. 졸혼은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가 만들어 낸 기발한 동거 방식이다. 이혼하자니 남 보기 부끄럽고 같이 살자니 사랑은 바닥나버린 희나리 부부에게는 남과 나를 속이는 그럴듯한 결혼 생활인 것이다. ‘냉수 먹고도 이를 쑤시는’ 한국 사람 정서에도 졸혼은 이혼을 면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다. 이 얼마나 졸렬한 처세이며 치사한 사랑인가.      


영어권에서는 한집에 살지만 애정이 식어버린 부부를 전시용 부부(Show window Couple)라 한다. 이들은 외부 모임이나 공식적인 행사에만 동행하여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시용 부부로도 견딜 수 없을 때 이들은 별거나 이혼을 선택한다. 미국법에 6개월 이상 동거하지 않은 부부는 어느 쪽에서든 이혼 청구가 가능하고 이는 법원에서 받아들여진다. 결혼에서 동거란 그만큼 중요한 조건이라는 뜻이다.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는 않으나 헤어지지도 않겠다는 결심? 졸혼은 그래서 이상한 것이다. 졸혼은 목 졸린 사랑이다.  

    

혼인이란 두 사람이 사랑과 신의로 맺는 약속이다. 혼인을 시작하여 유지하는 단계를 결혼, 그것이 파기 될 경우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으나 그것을 이혼이라고 한다. 내가 이혼을 부추기는 것은 정녕 아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진실할 수 없다면 정직한 결정을 하는 게 맞지 싶어서다. 수명은 대책 없이 늘었고 세상은 변했다. 금 간 사랑은 이미 독이다.     


90을 넘긴 석학의 얘기를 들어보면,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것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꼽는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나 건강수명을 생각하면 100년을 넘기는 쉽지 않다. 100년을 산다 한들 유한한 삶이다.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행복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돌팔매 맞을지 모르나 홍상수 김민희의 사랑을 나는 지지한다. 이 땅의 정서를 모르지 않음에도 그들은 꿋꿋이 두 손을 잡고 있다. 이들이 이목이 두려워 그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코미디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랑은 이기적이고 배타성을 지닌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자신의 사랑이 견고한 것임을 오래도록 살아 증명해 주기 바란다.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졸혼을 외치며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신성일은 소위 졸혼 후 다른 여인을 공개적으로 만났다. 왜 우리 사회가 엄앵란 신성일은 수용하고 홍상수 김민희는 경멸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항간에 홍김 커플을 불륜이라 한다. 졸혼은 윤리적인가?     


결혼이 위태롭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자라면서 서로 얽혀 한 나무인 듯 살아가는 것이 연리지다. 서로 얽힌 후에는 한 가지가 병들면 다른 가지도 함께 병들어 말라 죽는다. 아름다운 결혼은 종종 연리지에 비유된다. 극진한 사랑의 형태다. 세상이 엄청난 속도로 문명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사랑만큼은 천천히 변해가길 바란다. 우리들의 결혼이 무사하길 기원한다. (좋은수필,  24년 6월호)  (향기로운 삶, 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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