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책을 골라 구내 커피숍에 앉았는데 백발의 노옹이 돋보기로 책을 읽고 있다. 청바지에 잘 다림질된 흰색 목폴라를 입고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느리게 탐색하는 노옹. 그 곧은 자세와 백발의 조화가 눈부시다.
나는 그때 ‘사랑은 한가한 도락이 아니라 일’이라는 에너 퀸들런의 구절을 읽는 중이었다. 그러다 책을 슬몃 덮은 나는 노옹에게 빠져든다.
저이의 지난 세월을 알 수 없으나 저 단정한 몰입은 인생의 백미가 아닌가. 아마도, 치열하게 살았겠지. 가슴 아픈 후회도 있었겠지. 혼자 울던 시간도 가졌겠지. 날마다 재생하고픈 눈부신 순간들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과 미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을 테다. 그 먼 길을 돌아서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마음이 혼란할 때 서점에 간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서점에 간다. 수도원이나 산속에 들어 면벽할 만한 도량은 없으니 그저 서점에 간다. 책들을 어루만지다 발이 멈추는 곳에서 선 채로 읽기도 하고, 그러다 한두 권 사 들고 집으로 오면 마음에 일던 소요는 어느덧 잠잠해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 하지만, 혼자 사는 연습이 덜 된 나는 길을 묻고 싶을 땐 서점에 간다. 그러나 최근에는 온라인 서점이 영역을 넓히는 통에 책방이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게다가 책 읽는 인구도 줄었다 하니 종국에 서점이 사라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크다. 온라인 서점은 꼭 집어 필요한 책을 주문할 때야 수월할지 몰라도 손에 들어 만져 보고 뒤적이며 읽어 보는 여유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서점을 찾는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다. 책은 그 자체로 인격이다. 책 진열대 사이를 거니는 일은 교감하고 사랑 나눌 수 있는 책을 만나기 위한 극진한 수고다.
그 옛날 종로서적은 많은 사람의 약속 장소로 붐볐다. 비 오는 날이면 비좁은 입구는 더욱 분주해, 우산과 뒤엉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지만 아무도 누군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들은 책과 연애 중이었으므로, 다.
집을 나서 갈 곳이 없을 때 서점은 제격인 장소다. 한여름 더위와 한겨울 추위를 피하기에 서점만 한 곳이 없고 나의 옹색한 처지를 드러내지 않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 아니 좋은가. 그뿐 아니다. 책 제목을 훑어가는 재미가 대단하다. 책 제목도 시대에 걸맞은 흐름을 탄다. 한 시기를 공유한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하다는 뜻이겠지. 대형 서점을 천천히 돌고 나면 적이 세상이 보이기도 한다.
훔쳐보는 이가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오래도록 책 속에 앉아 있다. 한순간 가고 마는 사랑도 한가한 도락이 아닌데, 백발이 성성하도록 살아낸 시간에 굽이침이 오죽했을까. 노인의 고요가 위대함으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