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차

숙모의 정원

by 명진 이성숙

우이동 4.19 탑 입구 부자스럽지 않은 동네에 외숙모가 산다. 숙모의 정원은 야생화밭이다. 좁다란 정원에 빼곡히 얻어 심은 야생초들. 어느 수집가 댁에서 분양받아 오기도 하고 어느 산에서 얻어오기도 해서 식구가 된 것들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나는 우이동에 간다. 흐트러진 듯 정돈된 숙모 댁 정원에 앉아 있고 싶어서다. 야생화 하나하나의 이름을 살피고 그 꽃의 면면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일순간 삶에 생기가 돌아 내가 무엇을 고민했던가 잊게 되는 까닭이다. 꽃이 그리우면 가까운 들판을 찾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자연에 문외한인 내가 꽃인들 알까. 내가 들판에 서서 바라보는 꽃은 그저 한 가지 이름으로 피어 있는 들꽃이고 잡초일 뿐 내게 의미가 되어 주지 못한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숙모의 정원은 나의 몸짓에 의미를 더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어느 화분 하나도 이름표 없는 게 없다. 세상에 잡초는 없다는 것이 숙모의 지론이다. 게다가 등 뒤에서 일일이 그들을 매만지며 소개하는 숙모를 대하는 일은 내게 넉넉한 기쁨이 된다.


그동안 우이동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가지 못했다. 너무 멀기도 하고 치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 숙모에게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조심도 되었다. 대신 꽃이 그리울 땐 차를 마셨다. 나의 찻잔은 조선 청화백자를 재현한 백산 김정옥 선생의 작품이다. 이 또한 나의 취향을 이해하는 숙모가 신경 써 구해준 것이다. 이 청화백자에 차를 달여 마시는 시간, 나는 숙모 댁 정원을 떠올리며 매번 풍류선비가 된 듯한 도취를 만끽한다. 숙모 댁 정원만은 못해도 인간문화재의 작품이 내 손안에 있다는, 다소 속물 같은 과시욕이 충족됨과 동시에 들꽃을 사랑하는 숙모의 서민적 간결함이 전해져 와 내 의식은 고상함의 절정을 이룬다. 너무 냉정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으면서 도덕성과 이타심이 깨어나고 생활이 가져다주는 비굴함에도 초연해진다.


오랜만에 우이동에 가야겠다. 이젠 외할머니도 안 계시니, 숙모의 꽃 이야기 들어가며 천천히 차 한 잔 기울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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