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각줍기

삶의 접속사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by 명진 이성숙

삶의 접속사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인생은 접속사다. 어떤 날들은 부드럽게 흐르고, 어떤 날들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휘어진다.

우리는 늘 접속사를 건너며 산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 이들은 삶의 결로를 결정짓는 힘이다. ‘그리고’는 누적의 힘을, ‘그래서’는 인과의 논리를, ‘그러나’는 반전의 미학을 품고 있다.


어린 시절은 삶이 온통 ‘그리고’로 가득하다.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고, 소풍을 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상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모든 경험은 쌓이고, 새로운 사건은 어제의 연장선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이 시기의 ‘그리고’는 시간의 흐름과 같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이어지고 확장되며, 삶이라는 이야기의 재료가 되어간다. 실패도, 실수도, 모두 ‘그리고’ 안에 머물며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린다. 어린 왕자는 한 별에서 다른 별로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세계를 넓혀간다. 여우를 길들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나는 길들여졌어”라는 여우의 말처럼, 관계는 경험 위에 쌓이고 감정은 덧붙여지며, 삶은 ‘그리고’의 방식으로 깊어진다.


청년기 이후에는 ‘그래서’가 중심에 선다.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중요해진다. 일에 몰두했고, 그래서 자리 잡았다. 사람을 믿었고, 그래서 상처 입었다. ‘그래서’는 삶의 원인과 결과를 엮으며, 지금의 나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결과를 통해 존재를 확증한다. 자기 인생의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한 이들은, ‘그래서’와 함께 삶을 정리하고 평가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래서’의 서사 구조를 집요하게 밀어붙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과 정의 사이에서 살인을 선택하고, '그래서' 죄책감과 내면의 붕괴를 겪는다. 결과는 언제나 예측과 다르지만, 그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작품 속 ‘그래서’는 인과관계를 너머 인간 내면을 관통하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논리도 예측도 무력하게 만드는 접속사가 있다. ‘그러나’다.

사랑했다, 그러나 함께하지 못했다.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계획은 완벽했지만, 세상은 달랐다.

‘그러나’는 삶의 불확실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나’는 논리를 풀고, 감정의 골을 깊게 판다. 그 틈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상과 다른 현실 앞에 선 자신을 마주한다. 때로는 절망이고, 때로는 새로운 시작이다. 반전은 늘 ‘그러나’와 함께 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그러나’로 가득하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 미도리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지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은 종종 그렇게 앞과 뒤, 희망과 상실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다. ‘그러나’는 때로 사람을 꺾고, 어떤 꿈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뒤에 또 다른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이 삶이다.


지금 나는 여행 중이다. 여행길은 늘 ‘그리고’와 ‘그러나’가 교차한다.

부다페스트의 석양 아래, 낯선 언어 속에 묻힌 채 걷는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내 마음에 작은 문을 연다. 그러나 낯섦의 그림자는 외로움으로 다가온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언어를 듣고, 예기치 못한 풍경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만남들은 삶에 새로운 층을 더한다. 그래서, 내 마음도 조금씩 달라진다. 낯선 장소에서 나 자신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생경함 속에서 와락 달려드는 외로움까지는 피할 수가 없다. 낯선 감동 뒤에는 늘 낯섦이라는 고요한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제시와 셀린은 우연히 비엔나에서 만나, 밤새 걷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그리고 또 이야기하고, 또 걷는다. 사랑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그리고’의 연속일 것이다. 작별을 앞두고도 그들의 대화는 멈추지 않는다. 이어가고 싶은 마음, 연결되고 싶은 감정, 그것이 ‘그리고’다.


삶이 문장이라면, 우리는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사들 위를 걷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고’를 통해 삶을 확장했는지, 얼마나 많은 ‘그래서’를 통해 방향을 틀었는지, 얼마나 많은 ‘그러나’ 앞에서 머뭇거렸는지를 돌이켜 본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을 제시한다. 주인공 리는 아이들을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다시 살아가야 했고, 그러나 이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러나’가 영원히 남아 있는 쉼표이기도 하다.


삶은 마침표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을 맞았다 해도. 언제나 다음 문장을 준비하며 다음 접속사를 찾는다. 어떤 날은 덧붙이고, 어떤 날은 이유를 찾고, 또 어떤 날은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 앞에 멈춰 선다.


접속사는 삶의 구조다. 단절을 피하고 이어가게 하며, 단조로움을 깨고 반전을 부여한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내 안에 이어질 문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일도 나는 나의 접속사를 찾으며 삶을 쓸 것이다.


삶은 결코 직선이 아니다. ‘그리고’는 지난 시간을 잇는 처연함이고 그리움이며, ‘그래서’는 우리가 만들어낸 필연이며, ‘그러나’는 멈춘 자리에서 피어나는 가능성이다.

바야흐로 겨울이다. 눈 덮인 길 위에서 마음은 조용히 정리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단정한 결심이 움튼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우리는 또 다음 문장을 시작한다. (문예바다 2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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