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연
서문지 물은 저녁이 되면 먼저 눈을 뜨는 것 같았다.
해가 기울자 수면이 검붉게 눌어붙었다. 아라는 물가 앞에 멈춰 섰다. 젖은 흙 냄새와 오래 고인 물비린내가 서늘하게 올라왔다.
물 위에 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그 옆에, 다른 그림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아라는 숨을 멈췄다.
자기 것보다 더 크고, 더 선명한 사람 형체였다. 물결이 흔들리는데도 그 그림자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급히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척이 목덜미를 스쳤다.
“아라.”
낮고 젖은 목소리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라는 홀린 듯 물가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거기 서.”
등 뒤에서 날아든 목소리에 발이 굳었다.
처용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여긴 혼자 오지 마.”
“왜?”
처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문지 수면을 노려보았다. 그 짧은 시선만으로도 아라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렀어.”
아라가 낮게 말했다.
처용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다시는 대답하지 마.”
“누군데?”
처용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손목을 잡은 힘이 조금 더 세어졌다.
그 순간, 수면 아래 검은 것이 길게 흔들렸다. 머리카락처럼, 물풀처럼.
아라가 숨을 삼키자 처용이 몸을 틀어 그녀를 물가에서 떼어냈다.
“보지 마.”
너무 가까운 목소리였다.
아라가 다시 돌아봤을 때, 두 번째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수면 한가운데 파문만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그날 밤, 외황강 냄새가 방 안까지 들어왔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물비린내와 젖은 흙 냄새가 스며들었다. 아라는 잠에서 깨듯 눈을 떴다.
철썩.
한 번.
철썩.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라.”
이번엔 문밖이었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열자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멀리 외황강이 검게 누워 있었다.
아라는 홀린 듯 그쪽으로 걸었다.
강가에 닿았을 때, 검은 수면 위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서문지에서 본 그것이었다. 이번엔 더 가까웠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어둠뿐이었다.
“누구야.”
물 위에서 웃음 비슷한 소리가 번졌다.
“이제 와서 묻느냐.”
아라의 손끝이 떨렸다.
“당신이 날 불렀어?”
“네가 먼저 들었지.”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처용을 알아?”
“오래전부터.”
그 말과 함께 손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낮에 처용이 잡았던 자리였다.
“그는 말하지 않았겠지.”
“뭘?”
“네가 누구의 부름을 듣고 있는지.”
아라가 한 걸음 물러섰다. 발뒤꿈치가 젖은 돌에 닿았다.
그림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감각이 턱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숨이 막혔다.
“두려운가.”
속삭임이 몸 안쪽에서 울렸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네.”
그때였다.
“아라!”
처용의 목소리가 밤을 찢었다.
거의 동시에 그가 달려와 아라를 끌어당겼다. 몸이 크게 흔들리며 그의 가슴 쪽으로 기울었다. 거칠어진 숨이 바로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처용은 아라를 제 뒤로 감췄다. 그리고 검은 수면을 향해 낮게 말했다.
“물러나.”
그 한마디에 외황강 수면이 크게 출렁였다.
잠깐, 밤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숨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처용.”
처용의 몸이 굳었다.
아라는 그제야 알았다. 저 존재는 처용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면 위 그림자가 천천히 풀어졌다. 먹물처럼 번지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기척은 남아 있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듯.
아라는 자신이 처용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처용이 돌아봤다.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나왔어.”
아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몰랐다. 누가 불렀는지, 왜 따라왔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지.”
처용은 침묵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말 안 해?”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안 돼.”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숨긴 것이 너무 많았다.
돌아가는 길, 처용은 앞서 걸었다. 아라는 반 걸음 뒤에서 그의 등을 바라봤다.
한참 뒤 그가 멈춰 섰다.
“내일 개운포로 가.”
아라가 걸음을 멈췄다.
“거기 가면 뭘 보는데?”
처용은 대답 대신 어두운 바다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네가 왜 불렸는지.”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처용이 다시 걸음을 떼려는 순간, 아라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처용의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 검은 어둠만,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발끝에서 바다 쪽으로 길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라의 숨이 멎었다.
그때 처용이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젖혔다.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 속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라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밤 자신을 부른 것이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