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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희 Sep 07. 2015

늙은이와 젊은이, 시간 앞에서 대화를 나누다2

그림과 책이 어우러져 흘러가는 하나의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주제 : 늙은이와 젊은이, 시간 앞에서 대화를 나누다 2편


세 번째로 함께 읽는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는 이세 히데코의 그림책이다. 작가는 프랑스 여행 중 우연히 파리의 뒷골목 한 모퉁이 작은 창이 있는 작업실에서 손을 쉬지 않고 일하는 노인을 만났다. 그는 유리창의 작은 종이조각에 ‘나는 를리외르-RELIEUR(제본가)-DOREUR(금박가) 상업적인 책은 사지도, 팔지도  않는다’라고 써 놓고 제본을 하고 있었다.


를리외르(Relieur)란 오래되거나 망가진 책을 보수하여 새 것처럼 혹은 오래 소장할 수 있도록 하는 책 수리장인이다. 히데코는 마지막 아르티장(직인)의 강렬한 긍지와 정열에 이끌려 파리에 아파트를 빌려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이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다.   

소피는 식물 특히 아카시아 나무를 좋아하는 어린 아이다. 즐겨보던 도감책이 낡아 뜯어지자 새 책을 사지 않고 어떻게든 살려보려다 를리외르를 만난다. 를리외르는 소피에게 책을 고쳐주며 이렇게 말했다.   

책에는 귀중한 지식과 이야기와 인생과 역사가 빼곡히 들어 있단다. 이것들을 잊지 않도록 미래로 전해 주는 것이 바로 를리외르의 일이란다.”   

를리외르는 소피가 특히 아끼던 아카시아 나무로 책의 표지를 만들었다.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책은 두 번 다시 뜯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식물학 연구자가 되었다.  

어린아이 소피와 장인 를리외르와의 만남이 맑고 푸른 수채화 그림에서 어우러진다. 히데코는 짧지만 압축적인 글과 그림으로 세대 간 공감을 만드는 책의 가치를 잘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함께 읽는 책은 프랑스의 젊은 작가 조엘 디케르가 쓴 추리소설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2-문학동네]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많이 읽은 소설을 쓴 해리 쿼버트의 집 마당에서 33년 전 실종된 열다섯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해리 쿼버트가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되자 대학시절 그의 제자였던 마커스가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첫 소설로 그 해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단한 젊은 작가 마커스. 출판사와 독자들은 왜 마커스가 두 번째 소설을 써야 할 중요한 시기에 해리의 사건에 뛰어드는지 알 길이 없다. 마커스는 해리로부터 글쓰기와 인생을 배웠다. 해리가 하버대를 마다하고 버로스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해리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고교시절 우연히 얻은 작은 성공을 발판으로 자신을 거인처럼 위장한 채 세상을 속여오던 마커스의 진짜 모습을.   

해리는 미국 사람 전부가 이야기하는 한 작품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후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음에 좌절하고 방황했다. 사건의 결말에서 드러나지만 그 작품은 해리가 쓴 것이 아니었다. 해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은 채 살인용의가 된 이유이며 마커스의 비겁함을 한 눈에 알아본 까닭이다. 마커스는 젊은 시절의 해리였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조급했던 젊은 작가 해리. 잘못된 선택 후 겪었던 인생의 참담한 시간들을 반추하며 해리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는 결국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시간을 견뎌온 자만이 알 수 있는 삶의 정수들을 제자에게 가르쳤다.   

“해리, 당신이 준 가르침 중에서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어떤 게 가장 좋을까요?”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군.”
 “내 생각에는, ‘쓰러질 줄 알아야 한다’같아요.  

“내 생각도 같네. 삶이란 길고 긴 추락의 과정이라네. 마커스, 쓰러질 줄 아는 게 가장 중요하지.”  

끝내 진범을 밝혀내지만 그 결과 해리의 뒷모습까지 봐 버린 마커스. 그는 스승의 미발표 원고를 읽다가 자신이 무엇을 쓰던 “좋아. 자신을 믿고 끝까지  가봐!”라고 외치던 해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스승의 원고는 훌륭했다. 굳이 다른 이의 작품을 가로 챌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때의 해리는 혼자였다. 그 길을 앞서 걸은 이로부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까닭에.     


▲ 시간 앞에서의 대화, 캔버스 위에 연탄재, 아크릴, 116.8 x 91, 2009년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본다. 유진숙의 그림에서는 젊기에 고통스럽고 상처받은 이가 시간을 견뎌 온 늙은 이의 위로를 받는다. 젊은이의 상처와 좌절을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이 묵직하다. 찰나의 순간, 자신의 젊은 날이 지나간다. 그러나 젊은 이는 자신의 좌절, 고통에 사로잡혀 늙은 이를 바라 보지 못한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흘러간 시간을 돌이켜볼 수는 있으나 앞으로 올 시간을 가늠하긴 어렵다. 늙은 이가 젊은 이에게 해 줄 말이 있는 까닭이다. 젊은 이는 늙은 이의 시간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당시 늙은 이가 본 것을 알아차릴 뿐이다. 엇갈리는 시간! 그러나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편의 그림과 네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며 시공간을 달리하며  주고받는 늙은 이와 젊은 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빅토르 위고 작 [세기의 전설]-잠든 부즈의 여섯 번째 연-  

최초의 샘으로 돌아오는 늙은이는  

영원한 날들로 들어가며 변화하는 날들에서 나온다;  

젊은이의 눈에서는 불꽃이 보이지만   

늙은이의 눈에서는 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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