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당시 남친이었던 남편과 첫 해외여행을 갔다. 오사카로 떠나는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대판 싸운 다음날이었고, 공항에서 머쓱하게 만나, 머쓱하게 비행기를 탔다. 한 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7월의 오사카는 지옥문을 지키는 괴물의 겨드랑이 속 같았다. 덥고, 습하고, 끈적거리고, 가만히 있어도 땀과 욕이 절로 나왔다.
간사이 공항에 내려서도 손도 잡지 않고 연신 부채질만 해대며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투덜투덜 걸었다. 출구는 스무 개가 넘었고, 노선은 왜 그리도 복잡한지. 지하통로는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덥고, 먼지가 날렸고, 퀴퀴했다. 그런 통로를 걷는 ‘어제 싸우고 오늘 첫 해외여행 온 20대 커플’은 폭발 직전의 상태로 캐리어를 덜덜 끌며 탕탕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구를 찾고 밖으로 나왔으나 밖의 더위는 사태가 더 심각했다. 짜증이 극에 달한 채, 아무 데나 들어가서 에어컨이나 쐬자는 심정으로 그와 상의도 없이 내 멋대로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빨간 간판의 작은 초밥집이었다. 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눈에 익숙한 초밥 몇 개를 주문했다. 작은 나무 접시에 연어초밥 두 점이 나왔다. 땀에 달라붙는 앞머리를 말리던 부채질을 멈추고, 초밥을 입에 넣었다. 그와 나는 거의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거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와 미친 거 아니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사람이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헛웃음이 난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다. 흔히 예능에 쓰이는 ‘진실의 미간’은 이제 너무 클리셰가 되었지만, 왠지 모르겠지만 화도 났다. 그 어떤 묘사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이어지는 초밥들의 혀 폭격에 우리는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했고, 30분도 안 돼서 초밥 열 접시와 생맥주를 각자 1리터쯤 마신 채 알딸딸하게 가게를 나섰다. 언제 우리가 싸웠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말이다.
그렇게까지 싸울 일은 대체 뭐였으며,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는데 초밥과 맥주로 화가 풀린 건 또 무슨 전개였을까. 더위를 잔뜩 먹어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날이었던 건지, 지금보다 훨씬 남아돌았던 정력이 감정의 널뛰기를 즐겼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몇 시간을 데면데면하던 그 와중에 초밥 한 입 먹고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이 웃겼고, 고작 초밥 한 입으로 좋아질 기분을 굳이 몇 시간 동안 망치고 있었다는 사실도 웃겼다. 같은 생각을 한 듯 초밥집 앞에서 우리는 한참이나 실성한 사람들처럼 웃었다.
자연스레 감정의 진폭이 줄어들어 웬만한 일에는 기쁘지도 화나지도 않는 요즘, 그 여름의 초밥집이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웬만큼 맛있다는 음식은 한 번씩 먹어봐서인지, 이제는 맛보다 분위기를 위해 ‘맛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지금의 안온하고 평안한 일상도 나쁘지 않지만, 가끔 피 터지게 싸우고 눈물의 화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그 시절의 연애가 그리울 때도 있다. 지나가버렸기에 아름다워진 기억일 테고, 돌아갈 수도 없지만 말이다.
아마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남편과 나란히 엉덩이가 퍼져라 누워서 TV를 같이 보는 지금의 일상이 복에 겨웠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안정감 없던 그 시절의 나는 부서질 것 같은 일상에서 자주 고통스러워했으니 말이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그리워한다니. 자의식 과잉인 건지 부족인 건지 영 헷갈린다.
PS. 씁쓸하게도 그 초밥집은 몇 년 뒤 ‘혐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우연히 들어갔는데 유명 맛집이었던 것도 놀라웠다.) 다시 갈 일이 없어져버렸기에, 젊음과 마찬가지로 더욱 완벽한 서사가 된 셈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