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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Nov 06. 2020

포기의 역사

프로포기러의 기록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이름도 화려한 스티브 잡스, 엘론 머스크,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 등등. 모두 포기하지 않고 한계를 넘어 각자의 분야에서 성취의 역사를 일궈낸 인물들이다.



보통 성취의 역사를 이끈 인물들에게는 ‘경쟁자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 수식어는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스스로와의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바로 나, ‘프로 포기러’에게도 해당된다.



이 글은 웬만해선 포기하고 한계 근처에서 늘 돌아가는 나의 포기의 역사를 기록한 글. 동시에 내가 바보임을 만 천하에 알리는 글이다.



7살, 영어학원을 포기하다. 꼬부랑꼬부랑 무슨 말을 하는지 원. 엄마 등살에 떠밀려 가긴 했지만 기초가 탄탄하지 못했던 나는 그곳에서 이뤄지는 대화들에 나만 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곱 살의 내가 내린 결정. 학원버스 놓친 척 하기! 프로포기러는 역시 떡잎부터 다르다. 등 하원 버스를 타러 간 나는 근처 건물 화장실에 숨었다. 한 달 내내 버스를 놓칠 리 없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엄마는 나에게 더 강요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이 넘는 지금까지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영어를 빅뱅이론, 모던 패밀리로 배웠으니 아직도 내 영어실력은 겉만 번지르한 모래성, 부실공사다.



중3, 엘리트코스를 포기하다. 당시 수학 과목에 뛰어났던 나는 지역 과학고등학교에서 주관하는 영재교실에 선발되었다. 역시나 중도 포기. 내 실력에 비해 너무 큰 크레딧을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멤버는 총 20명. 나를 제외한 19명은 모두 과학고에 진학해 조기졸업, 대부분 카이스트, SKY 대학을 갔더랬다. 그중 몇몇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데 아직도 나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왜? 나는 들어갈 때부터 나올 걸 알았는데? 참고로 나는 일반고에 진학해 문과를 선택했다. 너무도 즐거운 한국지리. 덕분에 나는 지역 축제란 축제는 지금도 다 꿰고 있지! 아직도 그립다 메가스터디 이기상 선생님.



대학교 1학년, 운전면허를 포기하다. 사실 이 이야기는 너무 민망해서 글로 쓰기도 부끄럽지만 역사니 왜곡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것만 열심히 하는 나는 굳이 만점 받을 필요도 없는 운전면허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으셨더랬다. 필기는 잘 보고 싶었는데 정작 운전은 하기 싫었던 거니? 실기시험에서 운전대를 잡고 얼어버린 나는 또 중도포기. 이력서에 누구나 기재하는 운전면허 자격증도 나는 못 적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이 모이면 혀를 끌끌 차며 놀리는 나의 치부.



대학교 졸업반, 전공을 포기하다. 사실 전공은 졸업반이 되기 전 진작 포기했다. PD가 되기엔 창의성이, 기자기 되기엔 지식이, 작가가 되기엔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이토록 객관적인 자기 평가라니. 그리고 나는 항공서비스과도 아니면서 승무원이 되었다.



물론 기를 쓰고 열심히 한 일들도 있었다. 내가 포기하는 일들은 대개 남들은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러니 바보 소릴 듣는다. 남들 다 하는 그걸 못해서! 우리 엄마의 단골 멘트. 그래도 남들 못지않게 잘 살았다. 영어 기초가 부족해도 승무원으로 일하며 해외에서 굶는 법이 없었고, 엘리트코스를 밟지 않아도 밥벌이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집순이니 운전은 안 하면 그만. 방송 전공을 살리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TV 시청에는 조예가 남다르다.



반복하자면 이 글은 아무도 기록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직접 쓰는 나의 역사, especially the history of giving up. (보시라. 문법은 엉성해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면 찰떡같이 이해한다.)



성취의 역사만 화려한 것이 아니다. 나의 포기의 역사는 더 화려하다. 대단한 사람들만 자신을 뛰어넘기 힘든 게 아니다. 나도 나를 뛰어넘기가 참 힘들다.




I know,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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