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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Nov 17. 2023

아이는 우중충한 날도 기꺼이 추억으로 만든다



다온이와 함께한 지 어느덧 3년하고도 7개월이 다 되어간다.

매일매일 육아일기를 수기로 쓰는 엄마들도 있다지만 하루살이 육아를 하는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잠 부족에 치이고 아픈 허리에 치이고, 찌뿌둥한 기분에 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 나를 갈아 넣을 수 있는 힘은 아이가 주는 찰나의 특별한 순간에서 온다.




오늘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아이를 등원시키는 오전 9시부터 태권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어스름한 저녁시간까지 부슬부슬 어수선한 비가 내렸다. 미세먼지까지 '나쁨'이라 스산하고 으슬으슬 하기까지 했다.

낮잠을 자지 않는 아이인지라 하원 시간이 빠르다. 13시. 나의 자유시간은 적게는 3시간, 많게는 4시간이다. 말이 자유시간이지 청소에, 분리수거에, 반찬 장만, 빨래까지 하면 남는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이다. 밥을 먹을까 눈을 붙일까 고민한다. 둘 다 할 수는 없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이의 표정은 엄마를 보자마자 흥분 그 자체. 매일 보는 엄마인데 그렇게나 반가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10분만 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온데간데없다. 아이를 꽉 안아주고, 고사리 손을 꼭 잡고 챙겨온 간식을 먹으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비가 오니 불편한지 엄마 손을 놓는다. 아이가 클수록 엄마 손을 잡는 시간이 줄어든다.




어른들에게 오늘 같은 날은 지저분하고 찝찝한 한낱 날씨일 뿐이지만 순수한 아이에겐 어느 때보다 즐거운 놀잇감이 된다. 장화를 신고 빗물 고인 웅덩이에서 참방참방 뛰기를 반복하더니 '엄마 빗물이 고여서 강이 되고 있어.' 예쁜 말을 한다.

그러네, 강이 되고, 바다까지 되겠네. 별것 아닌 엄마의 말에도 눈이 동그래지고 웃음이 터진다.




카페 가는 길,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엿을 보더니 맛있을 것 같다며 고른다. 이름이 엿이라고 알려주니, 멍멍 할아버지(외할아버지) 집에 있던 책에서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몇 달 전 읽은 책인데 그걸 기억하다니. 출산 후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두뇌와 달리 아이는 점점 총명해진다.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우리 다온이.




다온이는 빵보다 떡을 좋아한다. 오늘은 하원 간식으로 주문한 송편을 먹으면서 엄마한테 하얀색 송편 하나를 나누어준다. (하얀색이 가장 많았다.) 맛있다며 먹으니 '엄마, 내가 줘서 더 맛있지?' 묻는다.

'그러네, 우리 딸이 줘서 정말 맛있네. 엄마 하나 더 먹어도 돼?' 물으니 단호하다.

'아니! 그 정도면 많이야.' :)

어린이집을 다닌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하원 간식을 준비했다. 그 모든 시간이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가 크면 이 순간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태권도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좋아하는 어린이집 친구를 따라다니더니 동작도 곧잘 따라 하고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강해지는 게 보인다. 오늘은 친구가 아파서 오지 않아 분위기가 낯설었을 텐데도 씩씩하게 훈련을 마쳤다. 용기, 성실, 예절 세 가지 칭찬 스티커를 받고 관장님께 '감사합니다!' 크게 인사한다. 세상 그렇게 씩씩할 수가 없다.




돌아오는 길, 추운 날씨에 온 동네를 돌아다닌 탓인지, 태권도 훈련이 고되었던 탓인지 안아달라며 보챈다.

'다온아. 우산으로 지팡이를 짚어봐. 그럼 다리가 세 개가 돼서 덜 힘들어.'

'엄마, 부러워. 문어랑 오징어가 부러워.'

엉뚱한 상상력이 엄마를 놀라게 하고 순수한 생각이 엄마를 웃게 만든다.

방금까지만 해도 걷기 힘들다더니 다리가 세 개가 되었다며 신나서 폴짝폴짝 뛴다. 땅을 밟지 않고 떨어진 낙엽만 밟겠단다. 그러더니 대왕 낙엽 발견.

'엄마 이것 봐! 다온이가 엄청 큰 대왕 나뭇잎을 발견했어. 엄마 선물로 줄게. 엄청 이쁘지?'

'우와 정말 예쁘다. 엄마가 다온이 준 나뭇잎 부채로 써야겠다. 엄청 크네!'




집에 오니 저녁시간이다. 의사 표현이 분명한 4살은 어젯밤 오늘 저녁 메뉴로 오이 반찬을 주문했다. 배고플까 빠른 손놀림으로 오이를 씻고 껍질을 벗기고 총총 썰어 국간장, 깨소금, 들기름으로 조물조물 묻혀 라구 파스타와 함께 차려주었다. 라구는 어제도 먹었던 저녁 메뉴다. 너무 맛있다며 오늘 한 번 더 먹고 싶다니 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정성스레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 아이는 입이 짧다. 어릴 적 나와 똑 닮았다. 입 짧고 살 안 찌고 자주 아픈 아이들 특징이 영양가 없는 것만 좋아한다는 것. 나는 어릴 적 열무김치와 쌀밥만 고집했다. 오이 반찬만 두 그릇째 리필하는 아이를 보니 나를 닮아 웃기면서도 걱정이 된다.




그래도 오늘은 태권도로 체력을 소진한 덕분인지 좋아하는 저녁 메뉴를 개구리 배가 될 때까지 먹고 블루베리까지 한 그릇 싹 비웠다. 졸음이 쏟아진다. 침대에 누운 지 10분이 채 안 되어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이 고요함이 영원 같다.




오늘은 으슬으슬하고 지저분한 날씨가 분명했다.

그런데 왜일까. 아이와 함께한 하루의 장면 장면에 푸른빛 필터가 씌여 기꺼이 늦가을의 추억이 되었다.




나의 나쁜 하루도 기꺼이 벅찬 감정으로 채워주는 아이 덕분에 오늘도, 내일도 나는 기꺼이 하루를 버티는 힘을 얻는다.

아이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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