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은신처에서 보내는 2년간의 메시지
얼마 전 한글날 큰 아이는 독서 골든벨에 참가하게 되었다. 10권의 선정 도서 중 한 권이 웅진주니어에서 나온 <안네 프랑크>였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우리 가족은 목포 여행 중이었다. 목포 근대역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과 남아있는 일제의 가옥들을 둘러보며 나는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을 살펴보았다. 역사에 견해가 짧은 나는 우리의 일제 강점기와 2차 세계대전에 주목했고, 평화의 소녀상과 나치의 감시 아래 있었던 소녀 안네가 연결됨을 느꼈다.
독서 골든벨을 마치고 단지 내 작은 도서관에서 <안네의 일기>를 빌려 왔다. 아이들이 읽기 쉽게 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소개와 중간에 그림들이 삽입되어 있었다. ‘키티’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시작되는 일기 하나하나가 십 대 사춘기 소녀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나도 가지고 싶은 나만의 소울 메이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 편지글 형태로 작성되어 있었다. 한때는 속삭이는 듯, 한때는 정중하게, 한때는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을 이야기하는 안네의 일기를 보며 십 대 시절의 나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선생님께 매번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일기에는 솔직함을 드러낼 수 없었던 나는 두 개의 일기장을 가지고 일기를 쓰곤 했다. 비밀 일기장의 첫 번째 페이지에는 행여 부모님이 훔쳐보시기라도 할까 ‘이 일기장을 열어보면 저주를 받는다.’와 같은 문구를 적어놨던 것 같다. 우리 딸에게는 그렇다 할 사춘기가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 곳곳에 말괄량이이고 수다쟁이인 밖으로 보이는 자신과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좋은 쪽의 안네를 만날 수 있다. 그 속에서 사춘기 시절의 내가 문득 떠올라 잠시 수줍었다.
<안네의 일기>에는 나치의 눈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살게 된 안네의 가족과 판 펠스(일기 속에는 판 단으로 표기됨) 씨네 가족, 치과 의사인 프리츠 페퍼 등 8명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은신처 가족들을 도와주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회사의 직원들의 노고와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당시의 전쟁 상황들을 엿볼 수 있다. 읽는 내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과 엄마에 대한 불신 그리고 페터 판 펠스와 피어나는 사랑 등을 일기장 ‘키티’에게 솔직하게 전하는 사춘기 소녀의 비밀스러운 고백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더욱 절절했던 것은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의 소녀가 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안네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나 시대의 상황, 미래에 대한 희망, 자신만의 신념들이다. 2년간이나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이 두려움 속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대견하게 느껴진다.
“나의 정의감은 흔들리지 않으며 엄마의 정의감보다 순수합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목표도, 나름의 의견도, 신앙도, 사랑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가 강한 성격의 용기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만약 신의 가호로 살아남는 일이 허락된다면 나는 엄마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아 보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인간으로 일생을 마치지는 않겠습니다. 꼭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은 용기가 필요하고, 명랑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_1944년 4월 11일 일기 중(<안네의 일기>, 문학사상사)
은신처에 거주하던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에 의해 <안네의 일기>는 1947년 6월 25일에 출간되어 세계 50여 개 국어로 번역되고 60년에 걸친 최장기 최대 부수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때 출간된 일기는 엄마에 대한 심리적 갈등과 성, 사랑에 대한 기록들이 아버지의 편집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네의 사후 50년이 지나 안네가 처음 쓴 일기와 안네가 나중에 책으로 내기 위해 고쳐 쓴 일기, 아버지가 편집 한 일기 등을 통합하여 안네 프랑크 재단에서 완전판을 출간하게 된다.
좀 더 깊은 안네의 내면을 읽고 싶은 충동에 나는 무삭제 완역판을 찾아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이는 내 옆에 앉아 지경사의 <안네의 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읽는 도중마다 내가 읽고 있는 날짜와 내용을 물었고, 책의 두께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글을 보면서 놀라워했다. 자신이 읽고 있는 일기보다 길고 더 많은 일기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무삭제판을 읽힌다면 일기에 대한 부담을 갖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축약되어 있던 안네의 내면과 문장력과 진실을 읽고 싶다면 무삭제판을 권한다. 다만 성에 대해서만 축약되었다고 바라보고 읽지 않기를 바란다. 앞서 전한 것과 같이 안네가 키티에게 고백하는 미움과 사랑, 분노 그리고 신념들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는 1929년 6월 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난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 학대 정책이 강화되자 안네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한다. 1942년 안네의 열세 번째 생일에 받은 일기장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안네의 일기는 1942년 7월 6일 은신처로 도피하여 1944년 8월 1일을 마지막으로 독일 비밀경찰에게 은신처가 발각되기까지 작성되었다. 안네 아버지의 비서였던 미프는 유일한 생존자인 오토 프랑크에게 숨겨두었던 일기를 전달한다. 아우슈비츠 해방이 있은 지 2년 후인 1947년 6월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나온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갇힌 좁은 공간에 살면서도 그 속에도 인간의 희로애락이 살아 있었음을 <안네의 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사춘기 소녀의 걸러지지 않은 솔직함을 통해 곧 다가올 우리 아이의 사춘기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한 반항과 언니에 대한 열등감, 아빠를 사이에 둔 질투, 패터와의 사랑, 성에 대한 궁금증, 세상의 부당함과 미래에 대한 열망 등이 그것이다.
<안네의 일기>를 단순히 다락방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십 대 소녀의 단순한 일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당찬 십 대 소녀의 2년간의 일기를 통해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신념과 열정을 배웠다. 또한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본 고백은 다시금 찾아 읽게 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심오하다. 안네가 유대인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어떤 성인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_<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나치 수용소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살아남아 ‘로고테라피’를 창시하고 전파했던 빅터 프랭클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멋진 여성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명성을 떨치고 있진 않았을까? 책을 덮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펼쳐본다. 안네가 살아간 시대와 우리의 시대를 함께 살고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 들을 위한 작은 활동으로 그 안타까운 마음을 메워보려 한다.
<참고도서>
1.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원작, 주유경 엮음, 김현정 그림, 지경사
2.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지음, 홍경호 옮김, 문학사상사
3.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지음, 이건영 옮김, 문예출판사
4. 안네 프랑크, 이사벨 토머스 글, 파올라 에스코바 그림, 서남희 역, 홍은영 감수, 웅진주니어
5.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