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후의 평범함이란 어떤 것일까?
“엄마는 꿈이 뭐였어?”
굳이 엄마 옆에서 자고 싶다는 아들 둘이 침대에서 쫓겨날까 봐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작은 아들이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큰 아들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엄마 꿈은 작가였고 그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랬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글 좀 쓰고 책 좀 읽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 꿈은 작가였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작가는 돈은 못 번다는 인식이 어린 나에게도 작용했고, 글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쓸 수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내 꿈은 실내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글 쓰는 거만큼이나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미술학원 한번 다녀보겠다는 꿈도 꿔 본 적이 없다. 우선은 미술학원에 다니면 초기 재료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그게 내 적성에 맞지 않으면 그 초기 비용은 아까워서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의 생각이 왜 거기에까지 미쳤는지 모르겠다. 혹 우리 아이가 그런 생각으로 꿈을 접는다면 나는 참 슬플 것 같다.
실내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대학가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는 한창 tv에서 러브하우스니 해피하우스니 해서 건축가들이 나와서 집을 고쳐주는 프로를 많이 했다. 내가 꿈꾸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줄 사람도 주위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저런 일을 하려면 건축과를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건축과를 지원했다. 건축, 토목, 환경과가 학부로 이루어진 건설공학부에 들어갔다. 최종 선택한 과는 토목과였고, 구조공학까지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IT 회사에 들어갔다.
우리 둘째는 자기 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 평범한 사람이 뭐냐고 물으니 아빠처럼 회사 다니는 사람이란다. 나도 어릴 때 그리 특별한 사람을 꿈꾸진 않았던 거 같다. 다만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가 되기는 싫었다. 사업을 꿈꾸지도 않았고 회사에 다니며 월급 받아 사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꿈꾸는 직업에 IT 직군은 없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삼십 년이 지나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IT 회사에서 제품을 기획하고 출시하고 품질을 책임지는 일을 했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현실적이었던 어릴 적 나는 IT가 우리 삶에 이렇게나 영향을 미치게 될 줄 몰랐다. 내가 그것을 이용하고 만들게 되는 직업을 가지게 될 줄도 몰랐다.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둘째가 살게 될 삼십 년 후의 평범한 삶은 어떤 것일까? 회사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명확하기는 할까? 아이가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계속 곱씹어 보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의 삶은 무척 많이 바뀌었다. 계속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관측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은 부모는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으로, 가족이지만 가족 안에서는 이미 언컨텍트 한 시간을 보냈다.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거실이 넓은 집의 형태는 개인적인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해 가족 모두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각자 개인의 삶을 살던 가족이 한데 모이다 보니 집 안에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매일 회사를 가던 부모가 재택근무를 한다. 학교나 유치원을 가지 않는 자식 때문에 일과 가사의 경계가 사라졌다. 계획 없이 닥쳐온 우리의 생활은 무질서했다. 짧게 생각되었던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고, 우리는 스스로 계획과 규칙을 만들며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다. 사회와는 언컨텍트 해졌지만 가족관계는 더욱 컨텍트해졌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삶이다.
평범하게 사는 삶이 가장 힘들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춰 살아가야 한다. 조금 뒤처지면 도태된다. 선두에 서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에는 위험이 도사린다. 평범한 미래의 삶을 생각하며 쏟아져 나오는 포스트 코로나와 관련된 정보들에 관심을 가지고 볼수록 이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형태의 코로나가 언제든 올 수 있다. 그것은 또 지금 안정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형태를 또 바꿀 거다. 우리 아이가 살아갈 미래의 평범한 삶을 위해 나는 그리고 우리 아이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