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라고 화를 내면서 노트북을 빼앗아 가기까지 할 건 뭐람. 이해가지 않는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그와 나는 보는 취향이 다르다. 드라마 이야기이다. 나는 사실 드라마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혹여 관심이 가는 드라마가 있어도 못 본 회는 그냥 건너뛰거나 대강의 줄거리만 읽고 다음 회를 이어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취향의 드라마를 골라 아주 꼼꼼하게 본다. 그렇게 연애시절 남편의 자취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의 남친이었던 이 남자는 나에게 보라며 몇 번이고 다시 본 드라마가 담긴 노트북을 내밀었다. 남편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침대에 기대어 드라마를 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옆에 온 이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 빽 화를 내며 노트북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닌가.
이유는 더 기가 차다. 드라마를 너무 성의 없게 본다는 것이다. 나는 16부작이나 되는 그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1.5배속을 해 놓고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무료하고 지지부진한 부분은 10초 건너뛰기를 위해 스페이스바를 눌러댔다. 그 모습에 이 사람 화가 난 것이다. 흡사 설렁설렁 공부해서 부모에게 혼나는 중고등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결혼 후에도 이 사람의 드라마 사랑은 여전했다. 결혼 후 바로 주말부부를 8년 동안 했기 때문에 매일 밤 어떤 드라마를 즐겨 봤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매주 주말드라마를 같이 챙겨보곤 했다. 주말에 하는 드라마는 내가 비교적 쉽게 보는 종류이다. 대부분 가족사는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내용이 가볍다. 남편은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주말 드라마는 비교적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나마 챙겨보니 같이 호응하면서 봐준다. 그렇게 우리가 신혼 시절 같이 보던 드라마는 <보석 비빔밥>이었다.
주말 드라마 이외에 내가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 보지 못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다. 그냥 다음 주에 그 다음부터 보면 된다. 중간에 사람들이 적어놓은 리뷰를 좀 읽으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 부분만 단편적으로 봐도 된다. 이런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드라마를 볼 때는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도 떠들지 못하게 한다.
주말부부 8년 만에 처음으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때서야 남편의 드라마 보는 방식을 알았다. 이번엔 아이유, 이선균 주연의 <나의 아저씨>이다. 나는 이 드라마 색이 너무 우울해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이 드라마를 몇 번이고 봤다. 그 덕분에 나도 이 드라마를 몇 번 봤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여러 번 보았다. 남편은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드라마 다시보기를 한다(나 혼자 방을 쓸 때는 방 안의 TV는 상상도 못했다.). 전날 기억이 나는 부분부터 다시 본다. 그런데 곧 코를 골면서 잠이 든다. 나는 코고는 남편과 틀어져 있는 TV 때문에 쉽게 잠에 들지 못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열심히 자고 있던 이 사람은 TV를 끄면 귀신같이 깬다. 보고 있는데 왜 끄냐고. 진짜 신기하다. 그렇게 남편은 동일한 부분을 몇 날 며칠을 돌려본다. 나는 동일 부분을 타의에 의해 반복보기를 하고 있는 거다.
드라마 연애시대
다행인지, 지금은 다시 주말부부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밤마다 드라마 정주행을 하고 있을 거다. 얼마 전 나는 왓챠에서 <연대시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로 결심했다. 빨리 돌리지 않고 정 속도로 정주행하기로 했다. 밤마다 혼자 천천히 드라마를 음미했다. 매일 밤 휴지 몇 장을 들고 코를 풀어가며 봤다. 스토리와 배우들의 역할에 몰입되어 보다보니 잠도 잊은 채 본 것 같다.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해가 될 법한 이 드라마를 우리 남편은 총각 시절에 그리도 감명 깊게 봤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작된 지 근 15년이 되는 이 드라마는 진부하지 않았다.
내가 <연애시대>를 본다고 하니 남편은 반가워했다. 주말 밤 함께 침대에 누워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같이 보던 날. 나의 몰입을 위해 남편은 절대 스포를 날리지 않는다. 하지만 대사 하나하나를 따라 읊조리거나 드라마 사이사이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손예진의 내레이션까지도 콕 짚어 주었다. 그렇다. 남편의 드라마는 내가 책을 정독 할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좋은 표현에 줄을 긋고, 따라 쓰고, 리뷰를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그 마음. 남편은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있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역시 다름 안에서 나와 비슷한 부분을 찾으니 이해가 되었다. 매개는 다르지만 방법은 비슷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이 사람을 읽어보기 위해 <나의 아저씨>를 보고 있다. 지난 주 남편에게 <나의 아저씨>를 보고 있다고 하니 아주 반가워했다.
"구조물에는 내력과 외력이라는게 있는데 인생도 똑같다고. 내력이 센 사람은 어떤 외력이 와도 견딜 수 있다고. 이런 말을 이선균이 하는데, 나는 이 말에 너무 감탄했잖아. 토목과 우리 한테도 정말 딱 어울리는 비유이지 않아?"
이미 신이 난 남편은 몇 회를 보고 있는지를 물으며 더 앞선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더욱 더 드라마에 몰입해서 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그의 배려임을 안다. 나도 기억에 남기고 싶은 명대사가 나오면 드라마를 잠시 멈추고 필사노트를 꺼내 받아 적는다. 드라마를 읽어보려고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