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2년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그래서 안 된다면 또 다른 데서 작은 가게를 열면 되지 않겠어? 아직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잖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하루키가 소설을 쓰고 싶어 운영 중이던 재즈바를 닫으며 아내에게 허락을 구하는 장면이다. 퇴사를 결심하며 나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남편에게 조차도 허락은커녕 통보였다. 그렇게 일 년 반이 흘렀다.
얼마 전 이전 회사 동료들을 만났다. 큰소리 빵빵 치며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막연하지만 그곳에는 희망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진짜 기대일 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희망이 아닌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나에게는 그 절실함이 부족했다. 그냥 허풍만 가득 차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고마워. 우리 식구 벌어 먹이느라 힘들 텐데. 관두고 싶어도 관둔다 말도 못 하는 가장이네. 나는 그냥 관뒀는데 말이야.”
“고맙긴. 너도 나 이삼 년 지켜보며 기다려 줬잖아.”
나는 가끔 뜬금없는 남편이 보내는 타당한 이유에 감동한다. 대화를 해도 통하지 않아 갑갑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건네는 이런 말은 내가 마음속에 가득 짊어지고 있던 짐을 한순간에 덜어 준다.
오백 개월 된 큰 아들이라 칭하는 남편이다. 아들 둘 까지 합치면 나는 영락없는 아들 셋 엄마 같다. 하지만 가장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나처럼 기분 하나에 사표를 던지고 할 처지가 못 된다. 내 마음의 짐은 내려줬지만 그의 짐은 내가 내려놓은 짐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안다. 그 짐을 같이 지어 갈 수 있도록 나는 또 그의 위로에 힘을 얻어 하루하루를 성의껏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