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바빠서 드라마를 잘 보지 못하지만, 나는 자타공인 드라마광이다.
한때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텔레비전을 아예 없앤 적도 있다.
그 시절의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몹시 아까웠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대신 아이와 책을 한 장 더 넘기고 싶었고,
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관리하고 싶었다.
그러다 OTT 서비스를 이용하게 된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드라마를 봤다.
이미 완결된 드라마를 보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고,
공휴일을 통째로 드라마에 몰두하며 보낸 적도 있었다.
단, 막장 드라마에는 크게 끌리지 않았다.
대신 잘 만들어진 드라마는 마치 잘 짜인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인물의 감정선이 촘촘했고, 한 장면, 한 대사도 허투루 놓이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타인의 삶을 엿보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더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저 선택 앞에서 나는 어땠을까’,
‘나라면 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는 늘 나를 밖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나에게로 데려오는 통로였다.
동시에 현시대를 읽는 도구이기도 했다.
52부작이 24부작이 되고, 24부작이 16부작, 16부작이 12부작으로 점점 짧아지는 드라마의 호흡.
과거에는 악인이 잡혀 감옥에 가면 끝이던 권선징악이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하고 싶어 하는 회기물이 유독 많아진 것도 눈에 띄었다.
그런 변화들을 보며 나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가늠해 보곤 했다.
그러던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묘한 드라마 시청 습관이 생겼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시놉시스를 먼저 읽는다.
그리고 결말이 새드엔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기 전부터 마음이 주저앉는다.
아예 보지 않거나, 한참을 미뤄두었다가 “지금은 괜찮을 때”라고 느껴질 때에야 재생 버튼을 누른다.
예전의 나는 새드엔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며 슬픈 결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비극 속에서 인간은 더 또렷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다르다.
드라마 속 인물이 감당해야 할 상실과 고통이 너무 쉽게 내 마음으로 건너온다.
이미 살아내느라 충분히 무거운 삶 위에 또 하나의 슬픔을 얹고 싶지 않다.
아마도 나는 이제 삶에서 ‘견뎌내는 이야기’보다 ‘조금은 숨 돌릴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하게 된 것 같다.
이건 감수성이 약해져서도, 현실을 외면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슬픔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오래 붙잡는지, 회복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를 이제는 몸으로 알기 때문이다.
새드엔딩을 피하는 이 습관은 나약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