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부부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최석우 시인의 말마냥, 한때는 가난해도 좋으니 저 사람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그 간절함 위에 일상의 먼지를 덮고, 때로는 서로의 다름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 했던 적도 있었다.
문정희 시인은 남편을 가리켜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표현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표현이다. 가장 든든한 보호자였다가도, 때로는 철없는 오빠 같고, 또 어떤 날은 세상에서 가장 큰 전쟁을 가르쳐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내 고민을 가장 먼저 의논하고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차, 이 사람만은 안 되지' 하며 등을 돌리게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존재.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사랑해 줄 유일한 남자는 결국 이 남자뿐이다. 재정난에 한숨을 쉬고, 남의 집 화려함을 부러워하다가도, 몸살감기에 정신 못 차릴 때 약을 사다 주는 이는 결국 '내 남편'이었다.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먹은 밥그릇 수는 얼마이며, 함께 치러낸 슬픔의 무게는 또 얼마일까. 첫 아이를 안고 함께 흘렸던 눈물, 부모님 상을 치르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던 그 온기가 오늘의 우리를 버티게 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더 많다는 말에 마음의 등불을 켜본다. 이제는 뜨거운 열정 대신, 잘 익은 장맛처럼 깊고 편안한 이해심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싶다. 날카로운 말들은 접어두고, 잔잔히 서로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