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기억의 색은 무엇이었을까

by 권성선

사람의 감정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로는 오래전 기억에서 피어오르기도 한다.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색으로 떠오르는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 솔직했던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날도 서점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릴 적 기억 중에, 자꾸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 있었다.
말 대신 내 눈앞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운동장 한쪽에 서서
혼자 핫팩을 쥐고 있던 어린 나.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서 있었다.

그때 내 마음엔 무슨 색이 번지고 있었을까.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이름.
따뜻한 손길 하나 없이

떨리는 손으로 상장과 꽃다발을 안고 있었던 그 순간.

나는 아마 그때부터 슬픔을 참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 기억은, 어떤 색일 것 같아요?”
그가 물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 짙은 남색. 파란색보다 더 어두운, 조금만 더 깊으면 밤이 되어버릴 것 같은 색.”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남색 안에는 분명히 당신을 지탱해 준 무언가가 있었을 거예요.
지금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그 색이 버텨준 시간들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떨궜다.
기억의 색이 그렇게 뚜렷하게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그 남색 속엔 외로움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나에게 꽃을 건넸고, 나에게 박수를 쳐주었고,
나에게 따뜻한 말 대신 조용한 응원을 보냈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 순간의 나는 나를 지키고 있었다.


기억은 아프지만,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안아주었던 그 마음만은
조금씩 다른 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짙은 남색 사이로 연한 회색과 초록빛이 스며들었다.


지금 내 안에는 그날의 내가 남긴 빛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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