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온 마을에 무성할 무렵 숲속 오솔 길에서 풀벌레의 연주를 들으며 푸르름을 한껏 숨 쉬던 소년이 있었다. 여름 한나절 소나기가 쏟아지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다 산들바람에 젖은 옷을 말리고 다시 산과 들과 냇가로 뛰어다니며 때 묻지 않은 들꽃 한 송이에 가슴 설레었던 시절,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코끝에도 그 향기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맡는 몽환의 신비로움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기만했는데 좋아하는 평소 맘에두고 있던 여자아이를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깜짝 놀라던 소년의 떨림같은 것 아니었을까.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어릴 때 하는 첫 사랑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즉, 아직 성숙하지 않은 정신세계로 인해 그냥 혼자 좋아하다가 철없이 끝나는 수도 있고 극히 드물지만 어떤 이는 첫사랑의 인연을 계속 이어내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도 있다. 시기는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유년기의 첫사랑은 학교에서 좋아하는 초등학생 짝꿍 일 수도 있고, 동네 누나 일 수도 있는 어린아이 본연의 순수한 마음으로의 좋아함이기도 하니, 이 때의 마음은 첫 눈같은 성스러움이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맑은 수정같은 마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시기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작은 맘에 다른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는 순백의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에 눈을 뜨게 되는 청소년기의 첫사랑은 이웃 집 여학생이나 등교 길 버스에서 만나는 여고생일 수도 있겠고, 친구의 누나일 수도 있겠다.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생기는 질풍노도의 시기,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도 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된 날로부터는 방향 감각 상실로 사방이 온통 암흑이 되고 신열의 열꽃을 터뜨리고야 만다.
사진 민병식여자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안녕, 몇 학년 이아? 난 중학교 3학년인데."
"난 고등학교 1학년이고 고향이 여긴데 방학이라 집에 내려왔어."
"그렇구나. 난 여기서 나진 않았고 아빠가 군인이신데 이곳으로 오게 되서 이사 왔어. 나 이제 집에 가야하는데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볼 수 있을까?"
고향의 냇가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 그 아이와 함께 했던 그 장소를 찾아 간다. 시멘트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생활과 끊임없는 일과 세속의 때에 지친 내게 이 장소는 끊임없는 순수함으로의 회귀를 꿈꾸게하고 무한한 평안을 주는 비밀의 장소였다.
시골 촌놈에서 도시의 청소년이 되어버린 것이 하루의 빛처럼 빠른 속도로 변해간 세상에서 잠시 내려 어린아이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곳, 그 자리에 그 아이가 있었다. 내일 보자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던 그녀는 지금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른이 되어 세상의 온갖 때를 뒤집어 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 어렸을 때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몽환의 향기에 취해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팔랑거렸음을 기억케 하는 그곳에는 치자꽃만이 남아 나를 반긴다.
며칠 되지 않는 시간, 평생 느낄 만큼의 수많은 떨림의 별똥별이 떨어졌던 장소에서 나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발자취를 남겨본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날, 깜깜한 밤 형광색 반딧불이 별 반짝이듯 온 마을을 날아다녔을 때에도 그곳엔 향기가 가득했었던 곳에서 첫 눈의 설레임을 나이가 뒤덮는 중년 즈음에, 위는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하나 꿈틀거리는 부유물이 침잠된 세상에 찌든 어른이 찌든 삶의 냄새를 잠시 날려버리고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첫 사랑의 순결함을 돌이키려는 향기에 흠뻑 취해있다. 조금 더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고자 하는 정갈함과 청결함을 바라는 첫 사랑같은 치자꽃 향기의 마음이다.
사진 네이버(위 배경사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