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고향역 철길 옆에는 망초꽂이 역사 주변에 가득 피어 있었다. 철길따라 앞 산 자락 시냇물따라 이름 모르는 들꽃이 나풀거리면 사방팔방 온통 봄향기가 날아다니고, 진달래, 개나리가 분홍 노랑 색으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는 동안 제복을 입은 역무원 아저씨가 빨강 초록 깃발을 휘두르며 봄을 몰고오는 기차 와 인사를 나누었다. 동무들과 고무신을 벗어 양 손에 쥐어들고 달리기 경주를 할 때, 들판에서 냉이를 캐던 동네 누나 들이 쳐다보다가 깔깔 거리고 철길을 따라 이어진 통나무 다리 밑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그마저 싫증이나면 앞 산에 올라가 병정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먼저 본 사람이 입으로 총소리를 내어 상대를 맞추고는 최대한 많이 살아남아야 이기는, 요즘으로 말하면 서바이벌 게임이었는데 때로는 맞았니 안맞았니 티격태격하다 늘 무승부로 끝나곤 했다. 하루종일 놀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어귀에 다다르면 벛꽃나무가 분홍색 융단을 바닥에 깔아놓고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겼고, 한걸음 더가면 초가집 지붕 들이 보이고 저녁을 알리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집집마다 굴뚝에서 솔솔 솟아오르는 연기는 저녁먹을 때가 되었으니 집에 어서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어렸을 때 살던 고향집에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일년에 한 두번씩 가보곤한다. 마을에 굴뚝들은 이제 없고 고향역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쇄가 되었고 풍요롭고 평화롭던 농촌마을은 사람 들이 많이 살지않는 을씨년스러운 마을이 되었다. 이제 어린시절 고향마을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은 늘 똑같다. 바쁘고 여유가 없는 꽉 짜여진 틀, 조급함의 시대에 살면서 아담하고 조그만 고향역과 철길따라 피는 꽃들, 그리고 동무들과 뛰놀던 앞산, 동네 어귀 굴뚝의 연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내게는 꼭 필요한 쉼과 포근함의 상징이되어 지치고 힘들 때 마음 쉼을 할 수 있는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외관으로는 문명의 엄청난 혜택 안에서 상상할 수없는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데 더욱 더 안락한 삶을 찾아 해매며 달려온 지금 치열한 경쟁속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지도 못할만큼 바쁘고 바쁜 세상에 이미 중독이 되었다. 코로나 19 시대, 앞이 안보이는 혼탁함 속에서 고통과 불안을 잊고자 우리는 또다른 익명의 세상, 가상의 현실에 중독되어 간다. 네모난 공간, 스마트 폰의 세상에 갇혀 위안 거리를 찾으며 계속 더 큰 자극을 주는 광경을 보지 못하면 계속 손가락으로 더 큰 자극을 찾아 클릭을 해대는 모습은 대면이 어려운 언 택트 시대
에 더하여 비인간화, 인간성 상실의 시발점이다.
지금의 나는 행복할까라는 의문은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따스한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이, 이슬 머금고 푸릇푸른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이 진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임에도 그걸 모른 체한다 . 땀흘려 그물을 만들고 그 그물을 던져 싱싱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포장된 통조림같은 유희를 따먹는 것이 더 급하다.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장애를 안고 살았던 '헬렌 켈러'는 남들 눈에 도저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상황임에도 행복하냐고 질문을 했을 때 ''행복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결국 행복의 척도는 세상에서 보는 기준이나 남들의 평가가 아닌 내 기준에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다 준 교훈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인간은 당장의 편의를 위해 순수의 자연을 파괴해버렸고 삶의 터전인 산과 바다를 황폐화 시켰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이 더 편하고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욕심과 이기의 마음이 중독의 삶을 가져오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19는 지나친 욕심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어서 깨닫고 되찾으라는 신의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다. 마음 놓고 어디든 갈 수 있었던 그 평범함조차 어려운 지금, 무엇을 더 잃어버려야 순수했던 어린시절 같은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