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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Feb 07. 2024

이빠진 그릇

마음 에세이

[에세이] 이빠진 그릇

한결


이른 새벽, 눈이 일찍 떠진다. 커피를 마시려고 컵을 들었는데 이가 빠져있다. 예로부터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빠진 그릇을 사용하는 것을 금기 시해왔기에 바로 버리려고 한다. 문득 이빠진 컵의 신세가 처량해보인다. 나도 쓰다가 이가 빠지면 버려지는 컵처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든다.  어영부영하다보니 내 나이가 어느새 이렇게 된지도 몰랐다. 눈깜짝할 사이라는 말이 있듯 지나간 세월을 펼쳐보면  복사지 한장도 안되는 짧은 분량이다. 언제 시간이 이리도 빨리 흘렀을까. 정년퇴직이 몇년 남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빨리 은퇴를 하고 싶지만 아직 편하게 쉴 수만은 없는 상황이고 한편으로는 이 어려운 시기에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 인사이동 후 새로운 업무에 적응도도 떨어지고 연이은 야근을 해서라도 자리를 잡겠다는 진취적 기상이나 도전 정신보다는 뭐든 귀찮다는 생각 뿐, 힘에 부친다. 아마 내 삶도 눈에보이지 않는 흠집이 점점 커지면서 그릇의 이가 빠지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하니 처량하다.


한편, 다르게 생각해보니 그릇에 이가 빠졌다는 것은 오래 되었든 어디에 부딪혔든  그 쓰임에 충실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생채기가 났다고해서 못쓸 이유는 없다. 작년 몽골 여행 시에 식당에 갔더니 접시며 컵이며 이빠진 그릇이 많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조금 어색할 뿐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몸이 다칠 때도 있고 때문에 흉터가 남기도하며 마음에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이 때는 수술과 투약, 상담 등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이빠진 그릇과 같지 않을까. 희로애락의 인생길에서 어찌 부침과 고난이 한번도 없었을까. 이빠진 그릇도 처음에는 반짝반짝 윤이나고 튼튼한 그릇이었으나 해가 갈수록 흠집도 나고 금도 가게된다. 그러나 그냥 사용해도 크게 불편함이 없고 접시 종류는 여름철 모기향을 피울 때 사용해도 좋고 컵같은 경우는 다육이를 담을 수 있는 예쁜 화분이 될 수 있다. 즉 이빠진 그릇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며 나름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면 온전한 그릇 못지 않다는 거다.


지금의 나는 젊은 세대보다 힘도 부치고 머리도 팍팍 돌아가지 않지만 아직은 활용도가 있고 아직 쓸 곳이 있다고 자위해본다. 젊은이들이 갖지 못한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여유와 오래 살면서 취득한 경험을 갖고 있고 신중함도 갖추고 있다. 진짜 이가 빠진 것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이다. 학교, 직장 등 사람사는 세상은 다양한 인간 상이 존재하는데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도 되고 해야하는 위치 임에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모습, 자신이 할일을 남에게 미루는 행동, 자신의 허물은 보지못하고 남의 허물만 지적하며 불평 불만을 일삼는 모습들을 보게된다. 바로 겉만 번드레한 목후이관(沐猴而冠)의 행태다. 이가 조금 빠지면 어떤가.  꼭 필요한 그릇일 때 사용되어진다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그 어떤 삶이든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다.중년의 나를 바라볼 때 아직은 활용도가 있고 쓰여질  곳이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나를 위해 준비된 길이 있을 것이다. 오늘을 살 때 때로는 버티고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애썼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욕심과 분노로부터 중심을 잡으려 흔들리면서 거친 세상의 바다를 유영하며 내일을 바라보는 삶의 여정에서 이빠진 그릇도 쓸모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의 내 앞에 놓인 삶의 숙제다.


아침부터 아직 겨울의 한복판인지 봄을 알리는 것인지 모를 비가 부슬부슬 하염없이 내린다. 이렇게 계절은 흐르고 나의 삶도 따라 흐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비를 맞이하게 될지 모르지만 비든 눈이든 다시 찾아올 것 들에 감사하고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살려한다. 오늘따라 시커먼 하늘과 차창을 두들기는 빗방울이 더욱 새롭게 보인다.

시진 전체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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