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길다길다하더니 또 비가온다. 해가 떴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그리 세차게 몰아치고 또 한나절을 퍼붓고는 그나마 소강상태였다가 또 비가 오고 이 놈의 변덕은 종잡을 수 없다. 출장을 나가자 마자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것도 차 안에 에 있을 때는 한방울도 안떨어지더니,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이 쏟아내는 거센 포효에 우산은 무용지물이고 바짓가랑이를 올려붙였으나 소용이 없다. 운동화가 금새 물을 먹는다. 찔꺽 거리는 걸음으로 자동차 경적소리와 어우러진 나뭇잎 들과 몰아치는 강풍의 장단에 박자를 맞추어 술에 취해 비틀거리듯 나도 함께 춤을 춘다. 대충 볼일을 마치고 비를 피해 차안으로 돌아왔다. 시원함을 넘어서 차갑게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비 세상과 마주 앉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새끼줄만큼이나 굵은 빗줄기와 어울린다. 라디오를 켠다. 여름에는 쨍쨍 내리쬐는 햇살과 그에 맞는 바다 노래가 제격이겠지만 비가 가져다 주는 분위기에 샹송같은 음악도 나름 괜찮다. '오도독 토도독' 차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러고 보니 안에서 바라보는 차창 밖의 모습은 구경거리가 참 많다. 불어오는 바람에 우산이 꺾여 어쩔 줄 몰라하는 여학생,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를 맞으며 홀딱 젖는 것도 불사하고 담담하게 걷는 청년, 편의점 넘어진 입간판과 바람의 힘에 넘어져 바둥거리는 플라스틱 의자도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요소들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세상 속에 있다.
주룩주룩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난 차 안에 비스듬히 누워 상념에 빠진다. 세차게 떨어져 파열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튀는 빗방울엔 여러 색깔의 감정이 들어있다. 어린 시절 비를 맞으면서 냇가에서 헤엄치는 장면을 생각할 때는 초록색, 청춘의 20대는 넘치는 힘을 발산하기 위해 이 곳저곳 정열의 붉은 색, 헤어진 옛 사랑을 추억할 때는 파스텔의 아련한 색깔이다. 비가 촉촉이 내려 대지를 적실때나 세차게 쏟아부을 때, 부슬부슬 부드럽게 내릴 때가 교차하며 마치 또렷이 기억나는 것들과 어렴풋이 흐려져 이제 점점 멀어져가는 추억의 잔상들이 빗방울 안에 담겨 떨어지며 지면에 닿을 때마다 터지면서 안개처럼 사방에 자욱이 깔린다.
퇴근 후에야 하늘이 조금 잔잔해졌다. 시원한 비내음이 도시에 깔리고 이따금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하늘을 배경삼아 하릴없이 걷는다. 목적지는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면에 닿아 비누거품처럼 소리없이 사라지고 이 때를 놓칠세라 가로수 위 매미가 기승을 부린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름은 이랬을 것이고 비를 보는 누군가도 이렇게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비가 갑자기 또 쏟아진다. 때마침 낮익은 커피 숍이 눈에 들어오고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길 건너편 도로 면에 갑자기 늘어난 빗물이 순신간에 급류로 변하여 배수구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순식간에 바닥이 깨끗해졌다. 내마음 속 찌꺼기를 뽑아내어 함께 흘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의 상처 들, 가슴에 똘똘 뭉쳐 갈아 내지 못한 분노 들, 왠지 모를 허전함과 쓸쓸함이 감도는 요즘의 마음 들, 모두 씻겨내려가고 이 비가 그치고나면 떠오를 청명한 하늘을 떠다니는 잠자리처럼 그저 자유롭고 싶다. 비는 계속 거세게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차의 본네트를 때리고 아스팔트 바닥을 갈기고 지나가는 우산들을 헤집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창을 두들긴다.
빗소리는 빗소리가 아니다. 비는 그냥 소리없이 내릴 뿐인데 대지에 떨어져 풀이 젖는 소리, 바닥에 부딪히는 파열음,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 우울한 내 마음을 건드려 나오는 한숨소리, 빗소리는 비가 내는 소리가 아니고 비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소리다. 내 마음이 평안하면 빗소리는 청아하고 맑게 들리고 내 마음이 불편하면 빗소리는 이곳 저곳 부딪히는 불쾌한 소음으로 들린다. 내일은 해가 떴으면 좋겠다. 그저 맑은 해의 빛을 받아 나도 맑아지고 싶다. 이런 걱정 저런 잡념 다 떨쳐버리고 파아란 하늘에서 볕처럼 비추는 밝은 마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