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밤이다. 주말의 밤은 내게 온전히 주어진 쉼의 시간이다. 이 때 난 책을 읽는다. 사방이 온통 고요하기에 집중도 잘되거니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에 딱 책 읽기 좋은시간이다.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어떨 때는 정신없이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얼굴에 책을 덮고 깜빡 잠이 들 때도 있다.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얼굴을 감싸는 아주 오묘하고 감칠맛나는 종이 특유의 냄새를 실컷 마신다. 고소한 원두의 냄새같기도 하고 낙엽의 냄새같기도한 아주 편안한 냄새를 맡으며 책 속으로 다시 빠져 잠이든다. 책 속에는 종이향 뿐만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향이 들어있다. 실제 코로 맡을 수있는 갖가지 꽃 향기,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향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쁨, 슬픔,사랑, 희망 등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종이책의 단점은 첫째 곰팡이가 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습기가 차지 않도록 공기를 쬐어주어야한다. 결국 자주 들추어보고 읽어주는 수밖에 없다. 또 한가지는 나무가 종이의 주 재료이기 때문에 환경 파괴를 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 부분은 무분별한 플라스틱의 사용보다는 나아 보인다. 나무는 또 심을 수가 있고 종이는 플라스틱이나 비닐보다는 빨리 썪으니까 말이다. 요즘은 종이 책을 대신해서 전자책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장단점이 있다. 전자 책에서는 갓 인쇄된 책에서 나는 알싸한 나무향이 없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고풍스러움이 없다. 무심코 책장 앞을 지날 때 언제 어디서 책을 샀는지, 몇 번을 읽었는지 읽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내 손 안에 펼칠 수 있는 편안함이 없다는 거다.
이렇듯 난 종이 책이 주는 모든 감촉과 향기, 느낌을 좋아한다. 비록 현대사회의 물질문명이 AI를 만들어내고 디지털 혁명을 이루어내어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독서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겐 아날로그의 감성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건 효율성이나 비용의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내 선택의 문제이다. 난 컴퓨터의 모니터나 휴대폰 액정에서 보는 글자보다 매끈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더 좋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아저씨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책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살 필요가 없는 책, 참고용 서적, 금방 유행을 지나가는 책 등은 전자책으로 읽는다.
작년 연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올 때 책의 3분의 2는 버렸다. 다 가지고 오는 수고로움이 부담스러웠고 새로운 집에 넣을 책장이 작았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을 이유로 버리고 왔지만 책들에 대한 나의 기억들과 마음들을 다 잃어버렸다. 겨우 아끼는 책들을 들고 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지금,
보고서를 쓸 때나 기안을 할 때 등 모든 것을 컴퓨터로 해결하는 이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진 몰라도 종이책의 겉표지에서 느끼는 부드러운 촉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넘기는 부스럭소리, 잠시 쉴 때 꽃아넣는 책갈피에서 얻는 휴식, 다시 볼 때 손을 뻗어 책을 펴는 그 동작들, 책장 앞을 지날 때 보이는 책의 제목들이 주는 추억 들,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아날로그 인간인 듯하다.
현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속도와 간결함은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래서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전자책이 나온 것 아닐까. 그러나 빠름을 넘어 급박할 정도로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책까지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성과만큼 쉼도 중요하고 빠른 만큼 느림도 중요하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것도 좋지만 반대급부로 번 아웃이 온다면 그 폐해는 더 크다. 독서란 책 내용을 읽는 것 뿐만아니라 책이 주는 기쁨, 즉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책과 내가 하나가 되고 감정을 이입하여 책 속의 등장인물과 배경과 사건 들과 대화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쉼이고 숨이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과 눈맞춤을 하고 악수를 하며 대화를 한다. 또 친구끼리는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는다. 연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스킨쉽이다. 종이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는 것, 이것이 책과 스킨쉽을 하는 것일게다. 언뜻 보면 전자책과 같아보이나 심히 다른 것은 전자책은 눈맞춤으로 끝나지만 종이책을 집어들며 눈맞춤을 하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책과 종이와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만지면서 몸과 마음을 내어주며 종국에는 책이 주는 감동, 교훈과 스킨쉽을 하는 것이다. 바로 종이책이 주는 아날로그 감성, 디지털이 일반화된 AI시대에 그래도 책만큼은 아날로그여야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