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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Feb 13. 2024

겨울 냄새

감성 에세이 14

[에세이] 겨울 냄새

한결


겨울날의 휴일 이른 아침이다. 눈을 뜨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다가 바람이라도 쏘이려 밖으로 나가본다. 찬바람이 품을 파고 들고 꼬끝이 쌔하다. 겨울 나절의 바깥공기는 차갑지만 실내 공기와는 다른 겨울향이 있다. 계절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풍경의 변화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의 냄새가 난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이 찾아오면 온 세상이 꿈틀거리는 따스한 흙냄새가 나고 여름은 온통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다. 가을에는 낙엽 떨어지는 냄새, 겨울은 바깥공기가 머리 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신선함의 냄새다.


사람에 따라 겨울 냄새를 다르게 느낄 수 있는데 난 눈내린 들판에서 볏짚을 태우는 냄새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들러 불을 쬐던 기차역 대합실 난로의 톱밥타는 냄새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눈 쌓인 논에서 동무들과 동그랗게 모여앉아 볏집을 태우노라면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이 등을 때리지만 매운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몸의 앞쪽은 뜨거운 열기를 받고 이때 맡을 수 있는 고소하면서도 매캐한 냄새는 커피를 볶는 냄새같기도 하고 낙엽이 썪어 흙이 된 부엽토의 냄새같기도 한 천상 겨울 냄새다. 기차역 대합실의 톱밥타는 냄새는 어떤가. 그곳은 전방에 위치해 있어 군부대가 많았던 고향의 특성상 휴가가는 군인들의 설레임의 장소였으며 동네 꼬마 들의 놀이터 였고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그동안 안보이던 뻥튀기 아저씨와 생선상수 아주머니까지 총 출동하여 난로가에서 수다를 떨던 만남의 장소였다.


커피 숍에 들렀다. 평일엔 일에 파묻혀 꿈도 꿀 수없는 사치를 휴일에 누려본다. 내일은 긴장을 풀고 늦잠을 잘 것이기에 한결 마음이 가볍다. 제목은 모르지만 은은한 팝송의 선율과 옆 자리의 대화 소리가 섞여 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소음마저 정겹게 느켜지는 것을 보니 오랜만에 여유를 찾은 듯하다. 창가 좌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 행렬이 장관이다. 저들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산 사람 들일 것이다. 천천히 한모금 들이킨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통과하면서 짜르르 속을 데운다.


중년을 맞으면서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 삶이 허기질 때는 무엇으로 채울까. 틀에 맞춘 도형처럼 각을 세우고 뽀죡한 끝으로 세상을 살다가 찌르고 찔리고 털럭거리며 구르는 모난돌멩이 처럼 세상을 구르며 빡빡하게 살아냈던 삶, 꾸벅 꾸벅 졸다가 문득 눈을 뜨면 겨울이 깜빡거리고 봄이 눈앞에 와있는 바로 찰나인 것이 인생이다. 삶은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빌리며 살아가는 것, 빚을 지고 빚을 갚는 순환의 구조다. 때로는 마음을 빚지고 때론 사랑을 빌리면서 평생 그 빚을 갚아나가면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음보다 육신에 매달려 죽지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마치 영생을 살 것처럼 행동하며 타인의 것을 빼앗고 상처를 주고 위에 올라서려한다. 삶은 돌아올 차표가 없는 편도 여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행복이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듯 아픔도 마음대로 버려지지 않는 존엄함과 동시에 천박함이 섞인 해와 비가 동시에 내리는 양면의 세상에서 봄의 온화함과 여름이 주는 청명함, 가을이 주는 원숙함과 겨울에 느끼는 따스함이 반복하는 우리 사는 세상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주 작은 행복에 있음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듯 삶은 그렇게 흐르고 흐른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내가 생각하는 사람사는 세상은 사람 냄새가 나는 세상이다. 우리의 인생이 셀수 없는 많은  역들을 지나 종착역에 다다르는 기차여행이라면 어린시절 고향의 역에 평생 머물고 싶었지만 공부로 성공을 시키겠다는 부모님의 자식 사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했던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까지 수많은 희로애락의 역을 지나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역을 지날 것이고 맞이할 것이다.

지금의 삶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떨어뜨려 놓은 불안의 역에 멈춰 서 있다. 고향 마을 사람 들이 다 떠나고 텅빈 대합실만 남은 기차역 같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역의 풍경은 이젠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기차여행은 끝이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역들을 만날 것이고 그 때마다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기차를 열심히 달리게 할 것이다.


누구나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비대면의 시대에 점점 세상은 강퍅해져만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고향 기차역  대합실의 활기찬 웃음과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의 추억이 행복한 여행의 한 장면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듯 삶의 기차 여행은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 마주친 많은 역들을 회상하며 웃음짓고 가슴에 담아 가는 그런 여행이지 않을까. 힘들고 때론 외롭더라도 다음 역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여행을 꿈꾸어야겠다.


창 밖으로 눈이 내린다. 고향의 대합실 난로 앞에서 그 누구든 소매를 잡아 당기며 가까이 와 불을 쬐라고 권유하던 그 풍경, 동무들과 부들부들 떨며 젖을 옷을 말리려 볏짚을 태우던 겨울 냄새가 그리운 휴일 오전이다.

사진 전체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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