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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Feb 14. 2024

암연(黯然)

마음 에세이

[에세이] 암연(黯然)

한결


퇴근 후 커피 숍에 들렀다. 이사온 집 근처에 있는 곳인데 분위기는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주 오다보니 익숙해진다. 오늘처럼 몸도 마음도 힘든 날이면 입맛도 없고 그냥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하릴없이 앉아 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마음이 정화되거나 속내가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은 넣어도 빼도 의미에 크게 변화를 주지 않는 문장에 들어가는 쉼표 같은 거다.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함이 없이 잠시 동안 그냥 앉아 있는 의 시간이다.


어젯밤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이리 저리 몸을 돌려 자세를 수십 번 바꾸어도 소용이 없어 밤새도록 뒤척거리다가 새벽을 맞았다. 눈은 따갑고 입안은 까칠하고 초대하지 않은 불면과 마주하느라 오늘은 하루 종일 허덕거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해야할 일은 해야하고 이것 저것 치이는 통에 마치 일년인 것처럼 길었던 하루를 커피 한 잔으로 달래본다.


가수 고한우의 암연이라는 노래가 흐른다. 잔잔한 이별 노래, 듣고 있자니 마치 내가 노랫말의 주인공이된듯 처연하다. 암연(黯然)의 사전적 의미는 어둡고 흐린의 의미로 이별할 때의 슬프고 침울함을 가리키는데  문득 이별의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암연(黯然),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의 마음을 이 말 이외에 어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헤어짐의 이유를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해오던 나로서는 죽음 이외의 이유로 헤어짐은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없으며 그런 이별이라면 사랑하지 아니함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로맨티스트이다.


남녀가 사랑을 하게되고 사랑이라는 둘 만의 여행길이 끝없는 진행형이라면 좋겠지만 중간에 이별이라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만나기도 한다. 쥐어 짜도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는 바짝 마른 눈, 죽을만큼 힘든 이별을 겪는 중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흐르는 강물은 1초도 쉬지 않고 위에서부터 흘러 아랫물을 밀어내고 돌을 던져도 그때 뿐 바로 전과 똑같이 흐른다. 그러나 겉으론 똑같은 강물이지만 강바닥 깊이 자리잡고 있는 돌덩이와 돌덩이를 받치고 있는 바닥은 흐르지 않는다. 이별의 아픔도 강바닥에 박힌 돌멩이와 같지 않을까. 시간이라는 강물이 아무리 흘러도 깊이 박혀 있는 아픔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찌 이별을 설명할수 있을까. 지금은 타계한 어느 영화배우가  이혼 후에 이런 말을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이 말은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헤어진다라는 말과도 같다.  사랑을 지우고 이별의 아픔은 둘이 나누어 갖든지  혼자 가져가든지 각자의 짐이 되자는 것, 서럽도록 소중한 그 출렁임을, 노을빛 아름다운 현기증같은 사랑의 시간들을 그냥 한 순간에 버리자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지키지 못한 사랑은 이기일 뿐이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 감탄하며 바라보지만 어느새 없어지는 얇은 구름과도 같다.


기대와 바람, 웃음과 울음, 미움과 질투, 이 모든 것들은 사랑에서 파생되는 부유물들이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사랑을 담금질한다. 서로 공유한 사랑의 시간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헤어짐은 없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다. 수천, 수만개의 점이 모아 시간 중 우연히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 그 인연은 스스로가 지키는 것인데 언젠가 만날 사람은 만나진다며 이별하는 이상한 논리는 두려움이나 자신이 없는데서 오는 자기 합리화이며 회피다. 고 피천득 선생님은 그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 우연히  마주친  세번 째의 만남은 차라리 아니 만남만 못하다고 하였다.


사랑은 그 적절한 시기와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별한 사람의 첫 날은 이제 막 과거가 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영혼이 야윈다. 이별 앞에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한 날로 기억되어 습관처럼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씁쓸히 웃음짓는 것보다, 이별  후 차라리 아니 만나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 언제가 우연히라도 한 번 어디서 마주치겠지라는 쓸데 없는 기대보다 이별이 내게 오지 않도록 현재 있는 사랑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 조심 채우고 가꾸는 것이 현명하다.


커피숍엔 어느새 연인 들로 가득차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청춘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참 예쁘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를 되뇌며 저들의 사랑이 영원히 불변하기를 바래본다. 깥 기온이 늦은 저녁임에도 포근한 것을 보니 이제 곧 봄이 오려나 보다. 세상을 온통 그리움으로 색칠하는 향긋한 봄이 오려나 보다.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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