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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l 17. 2021

화가의 눈을 알면 그림이 보인다/독후감151

& 천천히 그림 읽기/독후감152


 동양화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별로 관심도 없었다.

동양에서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물체의 하나하나를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묘사하는 대상의 기운이나 품격 등 주로 정신적인 표현에 중점을 두어 왔다.

 더구나 칠하는 순간 스며드는 화선지의 성질 때문에 동양화에서는 명암법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양화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적합하지가 않다.

 반면에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원근법과 빛의 상태를 중요시했던 서양화는 어떻게 지금의 현대미술까지 변화하게 된 것일까? 미술에 관한 책을 읽다 보니 미술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들과 내용들을 내 방식으로 나의 기준으로 나의 흐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시대의 미술은 기독교의 교리나 성서의 이야기를 교육시키는 도구였다. 중세의 미술은 성경을 읽을 줄 몰랐던 신도들을 위해 성경의 이야기를 충실히 전달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은 성경의 이야기나 역사화였다. 미술이 오늘날과 같이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기나긴 인간 역사에서 보면 아주 최근인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에서 시작해보자. 르네상스 양식은 15세기이다.

(르네상스 양식 전 12세기에서 15세기 무렵 까지를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르네상스 양식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림의 형태가 윤곽선으로 경계 지어져 있다. (선적인 것), 

병렬로 대상을 묘사하여 모든 인물이 나란히 열거되어 있다. (평면성),

모든 사물이 질서 정연하게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폐쇄된 형태), 

시선이 여러 부분에 고르게 가도록 마치 조명이 고르게 퍼져 있어 아주 작게 그려진 인물조차도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다원성),

명료한 선의 안정적인 표현으로 그림을 차분히 세심한 부분까지도 감상할 수 있다. (명료함)


 유명한 르네상스의 대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는 그려진 그림이란 실제 크기만 다를 뿐 화면 위에 옮겨다 놓은 또 다른 현실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 세계는 3차원이고 화면 공간은 2차원의 평면이다. 3차원의 현실을 화면에 옮기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한데 그 장치가 바로 원근법이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먼 곳에 있는 것은 작게 그리는 것이 원근법인데 15세기 원근법이란 수학적으로 계산된 공간의 재현 법칙으로 투시법이었다. 투시법의 핵심은 공간과 물체를 측량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보다 보면 가끔 투시법적인 원근법이 적용된 짜리 몽땅 우스꽝스러운 몸을 지닌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를 기억하는가? ‘큰 대大’ 자를 연상시키는.

왜 투시법적인 원근법과 정밀한 비례론 등이 르네상스의 특징이 되었을까?

15세기는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활발한 시기였다. 상업의 발달에는 수학이 필수였고, 기초 교육 과정에선 산술과 수학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게다가 당시에는 도시마다 다른 통화를 사용하고 있어서 환전을 할 때마다 비례를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예술가들은 수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매개로 하여 화가를 인문학자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과거에 예술가는 한갓 장인으로 취급당했지만, 사실 예술가는 인문학자와 마찬가지로 수학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교양인으로 인식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부오나르티 미켈란젤로 (1475~1564)의 <다비드 David>를 보자.

특히 그의 눈썹과 손목의 힘줄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피가 통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어떻게 이리 생생하게 인체를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해부학 덕분이었다. 반면, 고대 이집트의 조각 작품들은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동적이지가 않다. 왜냐하면 해부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한술 더 떠서 뼈가 어떻게 붙어 있는지, 근육이 어떻게 붙어 있는지, 동맥이 어떻게 붙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직접 자기 손으로 인체를 해부하며 인체의 구조를 확인하기도 했다.


 15세기 교회의 벽면에 그려진 그림의 대부분은 프레스코 fresco라는 기법으로 그려졌다.

프레스코는 축축한 회벽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려야 했다. 흡수성이 강한 회벽은 유화와는 달리 수정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 시대의 화가들이 완벽한 데생에 신경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한 번 칠하면 수정이 거의 불가능한 프레스코라는 재료에 있었던 것이다.

 프레스코는 흡수성이 강해 빛나는 색채를 낼 수가 없었다. 피렌체 르네상스 화가들이 색채에 관심이 적었던 이유가 바로 재료에 있었던 것이다.

 물감의 원재료를 안료顔料라고 부르는데 주로 광석이나 곤충의 껍데기를 갈아 만든 가루이기 때문에 화면에 안정되게 붙어 있지 못하고 떨어진다. 이 안료의 분자들을 서로 묶어주는 것을 미디엄 medium이라 한다. 이 미디엄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림의 종류가 달라진다. 미디엄이 물이면 수채화, 계란 노른자면 템페라화, 기름이면 유화라고 부른다. 템페라는 계란 노른자가 빨리 마르기 때문에 붓이 뻑뻑해져 부드러운 처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계란 노른자 대신에 기름을 사용하니 마르는 속도가 느려지고 붓놀림이 자유로워졌다.


 그림은 형식에 따라 분석할 수도 있지만, 내용에 의해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를 도상학 圖像學이라 하는데 도상학에서는 하나의 작품을 우리가 해독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이루어진 기호의 총체로 본다. 상징체계를 알아야 숨겨진 의미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어트리뷰트 attribute라는 장치를 사용하곤 했다.

어트리뷰트란 한 인물의 정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사물이나 속성으로 종교화나 역사화에서 그려진 인물들의 추측이 가능하다. 열두 사도 중 열쇠를 든 사람은 베드로다. 성경에서 예수가 천국의 열쇠를 맡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쇠라는 어트리뷰트를 통해 우리는 그 인물이 베드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대머리에 두루마리를 든 사람을 보면 사도 바울이라 생각할 수 있다. 두루마리는 각 교회에 보냈던 그의 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손에 십계명을 적은 석판이 들려 있는 사람은 모세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원래 혹이 달리거나 고르지 못한 모양의 진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궁정과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웅장하고 화려한 미술로 강렬한 명암법과 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현실세계의 생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 까지를 지배했던 바로크 양식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색과 명암이 한데 어우러진 전체로 다가온다. (회화적인 것),

겹침으로써 특징지어지며, 인물들이 뒤엉키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공간을 창출한다. (깊이감),

아무 규칙도 질서도 없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다른 후속 장면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개방된 형태),

인물 개개인보다는 전체 인상이 더 중요하다. 그림 전체에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통일성),

회화적인 무질서의 원칙으로 개별 대상을 부분적으로 덮어버리거나 숨기기도 한다. 화면 가득 찬 광채와 변화하는 색채도 불명료함을 더해준다. (불명료함)


 바로크가 르네상스 보다 뒤에 나왔다고 해서 ‘바로크는 르네상스보다 발전된 양식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바로크 다음에 공교롭게도 다시 고전주의적 작품이 등장하는 신고전주의 (18세기 말 너무나 관능적이고 말기적 현상을 보이던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동과 고대의 재발견에 고무되어 등장한 미술로 프랑스 문화에 그리스 로마 풍의 장려함과 복고 취향적 취미를 반영한 양식)가 나타난다. 자유, 무질서, 과장이나 환상 등의 분출이 지나치다 보면 거기에 식상해지기 때문에, 다시 질서와 규율로 향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기 마련이다. 양식의 변화는 예술가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마다 예술가의 의욕이 달라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들이 하나의 양식을 고집하고 다른 양식을 택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이제 19세기로 넘어가 보자!!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들을 보면 더 이상 미술의 발전이란 없을 듯이 보이지만, 너무나 생생한 그들의 그림도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다.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마음을 반영하는 그림을 낭만주의라고 한다. 뭉크의 <절규>에는 입체감을 강조하는 명암도 없다. 거리를 표현하는 원근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정확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한 해부학도 지켜지지 않았다. 색 또한 자연의 색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주관에 따라 온통 시뻘겋게 칠해졌다. 하지만, 뭉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내면의 공포와 불안을 현실적으로 보다 훌륭하게 표현했다.


 19세기 초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이 출현한 것이다. 과거 미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란 자연이면 자연, 정물이면 정물, 인물이면 인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려주는 일이었다. 사진은 미술가들의 생계수단을 뺏아 가버렸다. 실물을 똑같이 그리는 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미술은 사실적으로 그리는 일을 포기했다. 그 대신 사진이 못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한 미술이 인상파였고, 그 선구자는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였다.

 마네 전에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라는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가 있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겠다. 나는 천사는 그리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현실 세계에서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실에다 모델들을 불러 모으고 필요에 따라 포즈를 취하게 해 놓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마네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직접 그리기 위해 화구를 싸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막상 야외에 나가보니 태양 빛이 너무 강해 명암의 단계는 고사하고 너무나 눈이 부셔 물체를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인상파는 빛을 받은 사물의 순간적인 상태를 그리려 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태양의 상태에 따라 언제, 어떻게 변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상파는 순간적인 인상을 빠른 순간에 그리려 했다. 이렇게 빠른 순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네는 다시 2차원의 평면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을 시간도 없었다.

인상파는 원색으로 빛나는 빛을 그리려 했다. 그런데 비록 밝은 원색이라도 색은 섞으면 섞을수록 탁해진다. 인상파는 밝은 그림을 원했지만 색을 서로 섞게 되면 결과적으로 화면이 탁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신인상파 Neo Impressionism였다.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의 <그랑드 쟈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색을 섞어 칠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색점을 찍어 칠했다. 완성된 쇠라의 화면은 마치 보석과 같이 반짝거렸다. 점묘파란 물감을 색점으로 찍어 그려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간적인 빛의 상태를 밝은 색채로 그리는 인상파의 영향으로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화면은 불타는 듯한 색채로 바뀌었다. 그러나 고흐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고흐가 인상파 미술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감정의 표현이었다.

 고흐는 현실을 똑같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흐의 위대성은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 동안을 인간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뜨거운 마음을 다시 회복시킨 데에 있었다.

 19세기 후반 후기인상파 Post Impressionism의 대표작가 고흐와 고갱은 현대미술의 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결정적인 공헌이란 미술가가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 주관대로 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로 넘어가 보자!!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는 고흐나 고갱으로부터 형태나 색채가 꼭 사실적으로 그려질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마티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흐보다도 더 심하게 형태를 일그러뜨렸고, 고갱보다 더 격렬하게 색채를 칠해나가 1905년 야수파 (화가들이 사용하는 색채와 터치가 마치 야수와 같이 강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라는 유파를 탄생시켰다. 야수파는 색채를 형태와 관계없이 칠했다.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은 “나는 인상파를 존경한다. 특히 그들의 빛나는 색채는 정말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할 수 없다. 인상파의 말대로 물체는 빛의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빛에 따라 색채가 달리 보인다 해도 그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형태이다!”

 세잔은 입체감과 밝은 화면을 동시에 얻기 위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빛의 방향을 조정했던 것이다. 빛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것은 이제 그림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을 똑같이 안 그려도 된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이제 미술은 외부의 현실보다는 화면 내부의 구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잔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의 마음대로 시점을 바꾸어 결국엔 원근법과 명암법이라는 전통적 서양미술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미술의 방향을 화면 내부의 세계로 전환시켰다. 세잔 이후의 미술은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일에서 벗어나 그림 내부의 조형세계로 급속히 방향을 전환했다.


 세잔의 조형 사고를 그대로 계승한 사람은 1907~8년 피카소와 브라크가 창시한 입체파 Cubism화가들이었다. 우리 앞에 모나리자가 있다고 하자. 모나리자를 완전하게 표현하려면 모나리자의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 위에서 본 모습, 밑에서 본 모습을 한 번에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입체파의 믿음이다. 모나리자를 여러 면들로 단순화시키고 다음 순간 사방팔방에서 본 단순화된 모습들을 해체하여 펼친다. 그런 다음 각각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짜 맞춘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에 사방에서 본 모나리자의 모습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마네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은 세잔과 입체파를 거치면서 점점 형태를 단순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입체파의 조형 사고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간 사람은 피에르 몬드리안 (1872~1944)이었다. 처음에는 커다란 줄기들로 나무를 단순화하더니 점차 그의 그림에는 간단한 선들만 남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무는 수평선과 수직선만 남는다. 마지막의 단계에서 나무는 선 하나로 표현될 뿐이다. 이 수평선과 수직선을 조형적 미감에 따라 배치한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추상미술이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선과 선, 색과 면, 선과 면들의 조화이다. 이런 그림을 컴포지션 composition이라고 한다. 자연의 형태가 없어지다 보니 그림은 현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게 된다. 이제 화가들은 대상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은 캔버스를 세우지 않고 바닥에 커다랗게 천을 깔았다. 그리고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그는 마음을 완전히 풀어놓고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기쁨이나 슬픔, 놀람, 분노 등을 표현했다. 예술 그 무엇인가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해체시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기이한 형태로 만들어 페인트통에 담아 캔버스 위에서 흘리고 뿌려 그림을 그렸다.


 현대 미술가들은 그림에서 삶의 이야기를 다 지워버렸다.

“그림은 삶의 이야기를 옮겨다 놓는 장소가 아니라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이다!”라고…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 현대미술의 혁명적 업적이 있는 것이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자기 밖의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과거의 가치관이나 해석체계로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현실을 반영하는 미술 역시 복잡해진 현실만큼이나 복잡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은 이미지를 통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방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인데, 현대미술이 치중해온 것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 가에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심의 차이가 오늘날 관객과 작품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작품에서 억지로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보여 주는 세계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미술사를 정리하면서 득템한 현상 하나는 자꾸만 많은 그림을 보고 싶어 진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림에 대해 해석을 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그림을 해석한들, 작품에 감추어진 의미에 도달한들 내가 찾고 느낀 진리성은 어떻게 검증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더 많은 그림들이 보고 싶어 졌다.

그림을 파헤치고 분석하고 해석하지 않아도 그냥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을 미술사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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