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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Oct 23. 2021

갈리아 전기 /독후감166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는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이다.

갈리아로부터 남동쪽에는 로마가 있고, 로마 위쪽으로는 게르마니아 (오늘날의 독일)가 있다. 

내 유럽 동료들의 조상들이 갈리아에도 로마에도 그리고, 게르마니아에도 살았을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이두이 족이었을 것이고, 수에비 족, 우비 족이었을 것이다.

 [갈리아 전기戰記]는 총 8권으로 기원전 58년~51년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100~44 B.C., 영어식으로는 시저)가 갈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그의 군사활동을 적은 기록이다.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재임 중 6개 군단을 이끌고 트란살피네 갈리아, 키살피네 갈리아, 일리리쿰 갈리아 등의 지역을 획득하였다.

 이후 9년간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역의 복속에 전념하게 되었다. 또한 2차에 걸쳐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영국) 지역도 정벌하였다. 그의 [갈리아 전기]가 다루는 시기 대부분은 이때에 해당된다.




 갈리아는 이탈리아에게 중요한 지역이다.

그 당시 갈리아에는 아리오비스투스라는 게르마니아 인이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한 지역을 점거한 다음, 수많은 갈리 인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에 갈리 인들은 카이사르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피난지를 얻기 위해 ‘어디론가 이동할 수밖에 없다’며 카이사르를 위협해 왔다. 만약 게르마니아 인의 침략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이탈리아 반도로 갈리 인들의 대이동이 개시될 것이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총독인 카이사르로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갈리아 지역을 정벌하러 다니거나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 인을 정벌하러 다니는 카이사르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왜구를 토벌하는 이순신 장군 생각이 떠오른다. 두 분 모두 나라에 큰 공을 남겼던 명장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신중함을 배울 수 있다.

 하이두이 족에서 영향력이 강한 둠노릭스는 카이사르나 부족이 명령하지 않은 일을 저지르고, 수일 전 기병의 패전을 야기시키기도 했으므로 카이사르는 처벌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둠노릭스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둠노릭스의 형인 디비키아쿠스의 로마에 대한 성의와 카이사르에 대한 호의, 그리고 뛰어난 성실성과 정의감 및 온건한 태도를 알고 있는 만큼 동생이 처벌당하면 그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직접 모든 상황들을 설명하고, 둠노릭스를 불러내 형과 함께 동석시켰다. 그런 다음 힐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을 밝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바와 부족의 한탄을 설명하며 이후로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행동하라 충고하고, 지금까지의 일은 형인 디비키아쿠스의 얼굴을 보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해와 신중함이 있었기에 갈리아를 정복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결전일 등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했다.


 갈리아에서는 모든 부족부터 가족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당파가 있다.

가장 세력이 강하다고 인정된 사람이 중심인물이 되었고, 모든 일의 계획과 집행은 그들의 중재와 판단으로 결정되었다. 평민들은 거의 노예로 간주되어 귀족들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었다. 귀족들은 이들에 대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리와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

갈리아에서 존경받는 계급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제는 신성한 일을 하였고, 종교의 모든 일을 설명했다. 사제는 군무를 면제받았고 다른 일로부터도 제외되었다. 커다란 특전에 마음이 움직여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으러 몰려들었는데 어떤 자들은 그 교육에 20년 간이나 매달렸다.

 다른 한 계급은 기사騎士였다.

이들은 각자의 신분과 재산이 허용하는 대로 주위에 많은 추종자와 피호민을 두고 있었다.

 갈리아 부족은 모두 종교에 깊이 젖어 있었고, 전쟁을 하고자 할 때에는 전쟁의 노획물을 신에게 바쳐야 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사로잡은 동물을 희생물로 바쳤고, 다른 노획물들은 한 곳에 모았다. 부족들은 노획물을 쌓아 둔 곳을 신성한 장소로 간주했다.

 지참금 명목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받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계산하여 자기 재산과 합쳐 두었다. 이 계산은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그 이윤은 저축되었다. 부부 가운데 어느 쪽이 살아남더라도 두 사람의 몫과 그때까지의 이윤이 주어졌다.


 게르마니아의 풍습은 갈리아와 전혀 달랐다.

그들의 생활은 수렵과 무예에 힘쓰는 데 바쳐졌다. 또한 어릴 때부터 노동과 힘든 일을 찾았으며, 제일 오래 동정을 지키는 자가 칭찬을 받았다. 20세 전에 여자를 아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게르마니 인은 농경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우유와 치즈 그리고 고기를 먹었다. 그들 어느 누구도 일정한 토지나 자기 영지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매년 이동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손님을 난폭하게 대하는 일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손님에게는 모든 집을 개방하고 식사도 함께 했다. 게르마니 인은 오늘날에도 옛날과 같이 곤궁과 결핍, 인내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고 먹는 것도 의복도 변함없다. 반면, 갈리 인은 프로빈키아에서 가까웠으므로 외래품도 알았고 사치도 누렸으며, 편의도 보고 있었다. 전쟁에서 여러 번 패배에 길들어 게르마니 인과 무용武勇을 겨루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이 왜 유럽에 위치해 있는데도 조금은 다른지 이해가 간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중국, 일본과 왜 다른지 일맥상통하다.




 군단이라는 병력은 4,500명으로 10개 대대를 편성한다.

10군단은 카이사르의 최정예 병사들이다. 이렇게 많은 인력의 병력들과 인질들로 구성된 군대에서 리더십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게르마니 인들은 포로에 물어 카이사르가 멀리 전진한 것을 알고 로마 군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 이동한다. 몇 천 명의 게르마니 인이 두려워했던 것은 한 사람인 카이사르의 리더십이었다.

 현재의 회사나 군대의 조직은 기술로 인해 카이사르의 시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효율적이다.

사실상 예전과 목적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몇 백 명의 인원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은 카이사르가 위기를 극복하고 갈리아를 정복하는 승리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신중함과 주변인과의 소통을 잊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기원전 갈리아를 정복했던 칼과 투창은 변했지만 사고思考하며 소통疏通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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