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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n 25. 2022

위대한 미술책 /독후감201

미술에 관한 책을 의도적으로 접하며 읽으면서 생긴 질문들 그렇다고 굳이 찾아보며 공부해서 명확하게 하고 싶을 것 까지는 없었던 기저에 깔린 많은 궁금증을 해소했다.

누군가 이 책에 대해 ‘수준이 있는 미술책’이라고 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아방가르드’란 단어는 미술책에서 자주 쓰이고 보이는 단어다.

기성의 사회 제도와 타협하지 않았던 예술은 이제 인류의 보다 보편적인 해방을 구현하는 매체로 간주되었다. 생시몽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를 ‘아방가르드(전위부대)’라는 군사 용어로 설명했다. 단어로 의미를 푸는 것은 어느새 쉽게 잊힌다. 

마네(1832~1883)가 전통을 ‘참조’하고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차이’를 분명히 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의 리더가 되었던 것처럼, 고갱(1848~1903) 역시 마네를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차이’가 뚜렷하게 강조되는 아방가르드 전략을 채택했다. 고갱은 타히티 그림들로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선두적인 지위를 인정받는다.


 이와 같은 문장도 ‘아방가르드’를 이해하기에 적합하다.

피카소의 작품 가격은 폭등했고, 막대한 부를 축척했다. 귀족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작품 성향은 더욱 절충주의적으로 변했다. 보수적인 경향으로 간주되던 신고전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진영으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실험정신에 거부 반응을 보여 온 상류 사회로부터는 환영을 받게 된다.” 피카소가 20세기 최고의 거장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에서 두드러진 요소 중 하나가 ‘키치적’인 것이다.

제프 쿤스 같은 작가는 대놓고 예술적 키치를 만든다. 키치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키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을 통속通俗이라고 한다.

통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겉으로는 예술인 척하는 것이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의 고전적인 예는 ‘이발소 그림’이다. 편하고 어디서 본 듯하고, 상식적인 그림들이다.


 이런 키치들이 자본주의 시대와 만난 지금에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키치는 “예술과 자본이 하나로 합치되는 지점”이다. 혹은 “작품과 상품의 구분이 없어서 상품이 작품”이 되는 지점이라고도 말한다. 

‘키치아트’는 “성공한 팝아트의 변종”이며, 팝아트보다 “한 걸음 더 벼랑 끝으로 나아간 것”이다.

소비적 삶이 키치의 토양이 된다.

그러므로 키치는 우리 시대의 필연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젊은 세대의 경우에는 더욱 현저하다. 이것이 키치의 성공사의 배경이다.


 왜 그렇게 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에 열광할까?

풍경화에서 어쩌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자연을 마주할 때는 그 속에서 안식처를 찾으려는 욕망이 작동함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풍경화에는 ‘낙원에 대한 동경’이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풍경화 속의 풍경은 늘 언젠가는 가 보고 싶은 곳이다.

 바르비종파는 도시화로 인해 파괴된 시골의 전근대적인 풍경을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반면 인상주의자들은 숨 막히는 도시 생활의 대안, 노동에 대한 여가 활동의 공간으로서 풍경을 그렸다. 현대미술에서는 풍경화가 거의 사라졌다.

 우리가 풍경화 대신 스타벅스나 맥도널드의 간판이 그려진 컨템포러리 아트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상파 이전의 작품들은 공급되는 작품 수가 제한적이며,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에 이르러 수익을 내기 어렵다. 결국 구입 가능한 것은 동시대 미술품인데, 이 시장은 불확실하고 위험하다. 미술 전문지나 크리스티, 소더비 경매 도록에 등장했던 작가 명단 중 절반은 10년 후 사라진다. 이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 쉽지 않다.




 나만의 질문을 하나 만들어냈다.

과연 세잔(1839~1906)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영향을 받았을까?

세잔의 그림은 시각 원리에 근본적인 혁명을 초래했다. 

그는 눈의 진실에 따라 그림을 그렸고, 이후 원근법은 결정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세잔은 ‘인간은 언제나 복수의 시점’에서, 때로는 모순적인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점을 그림으로 증명했다. 인간은 두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점 소실점에 근거한 원근법은 인간이 한쪽 눈만을 사용한다고 착각한 결과였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누각들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지점과 시점을 암시한다. 정선의 그림 속에는 둘러보고, 올려 보고, 내려 보고, 지나치며 보고, 넘어 보고, 사이로 바라보고, 마주 보는 다양한 풍경 감상법이 구현돼 있다. 

‘와유적 풍경 감상’이란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듯이 보는 것”이다. 이제 풍경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그리고 지역 음식을 먹는 미각까지 동원된 입체적 감상의 대상이 된다.


 겸재 정선이 고민했던 것을 세잔도 똑같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이 둘이 어떤 방식으로 든 연결 되어 있었고 겸재가 세잔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나 저평가되어 있는 수묵으로 그린 한국의 산수화의 진가를 전 세계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까? 둘은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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